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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5 (수)

[수능과 과거시험]②수능 1등급은 4%, 과거 1등급은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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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소과 초시에 장원급제한 선비를 그린 그림(사진=서울역사박물관)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수능시험은 보통 9등급으로 이뤄지는 '스테나인(stanine)' 점수 방식에 따라 등급이 분류되며, 이에따라 1등급은 전국 석차의 4% 안에 드는 학생들이 받게 된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경우엔 따로 분류등급은 없었지만, 궁극적으로 최종 시험인 대과 전시까지 올라가 합격이 되서 임용이 되는 인원을 1등급으로 친다면, 전국 33등까지가 1등급에 들어간 셈이었다.

당시 전국 33등을 1등급으로 친다면 그 비율은 얼마나 될까? 18세기 정조 시기 과거시험 응시자가 보통 15만명 정도를 헤아렸다고 알려져있으며 이 숫자를 대입하면 전국 33등은 0.022%다. 합격률로만 치면 정말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시험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국 석차 1등인 장원급제는 물론 합격 자체가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에게도 엄청난 영광이었다. 생애동안 장원급제를 9번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린 율곡 이이 선생의 경우엔, 그 당시에도 그의 저서와 글씨, 소지품 등을 구해서 '기운'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할 정도다.

과거시험은 사실 맨 처음 시험인 소과 초시 합격자 숫자도 엄청나게 적었다. 소과 초시 합격자는 서울에서 보는 한성시에서 200명, 지방에서 보는 향시에서 500명을 뽑아 총 700명을 뽑는데 역시 전체 응시자를 15만명으로 두고 비율을 계산하면 0.46%에 불과하다. 오늘날 전국 석차 0.46%면 1등급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에 속한다. 여기서 또 2차 시험인 소과 복시를 통해 700명중 200명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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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등급을 나눌때 기준이 되는 스테나인(stanine) 점수방식(그래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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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나서 소과 복시까지 합격한 사람 중에서 다시 대과를 보기 시작한다. 대과 초시에서 240명을 뽑으면 다시 복시에서 33명만 남기고 다 떨어뜨린다. 이 33명이 최종 임용되는 인물들이며, 이들이 다시 임금 앞에서 면접시험을 보는 전시를 봐서 상위 3명은 갑(甲)과, 4등부터 10등까지 을(乙)과, 11등부터 33등까지 병(丙)과를 받았다. 갑과 합격자는 정7품으로 출발하고 을과는 이보다 2등급 낮은 정8품으로, 다시 병과는 을과보다 2등급 낮은 정9품으로 벼슬을 시작했다.

문과시험은 물론 무과시험도 임진왜란 이전에는 문과와 같이 매우 소수만 뽑았다. 소과가 없는 무과 시험은 대과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로 시험을 봤다. 최종 임용임원은 한 시험당 28~29명 정도로 문과보다 오히려 더 적었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장군도 무과 최종시험인 전시에서 병과 4등으로 합격했으며, 전체로는 12등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만큼 문, 무를 떠나 과거시험이란 것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웠던 셈이다.

한가지 아이러니는 오늘날 수능시험의 등급제와 입시문화 자체가 원조를 따지고 올라가면 서양에 수출됐던 과거시험이 다시 역수출되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19세기 중엽까지 입시라는 제도 자체가 없고 귀족들과 부르주아지들을 위한 추천제도나 매관매직제도밖에 없었던 서양에서는 중국과 교역하면서 과거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국의 홍차를 유럽에 팔던 영국 동인도회사가 먼저 과거제도를 참고해 직원 채용시험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이것을 영국정부가 1855년 공무원 임용시험제도에 활용했다. 이어 미국에는 1883년에 이 입시제도가 도입됐다. 이후 1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 미국에서 만들어진 SAT시험이 다시 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쳐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수능시험이 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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