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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아버지는 죽음 속으로 걸어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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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작가 필립 로스 자전에세이 '아버지의 유산'

매일경제

여든이 넘도록 경이로울 만큼 건강했던 남자는 어느 날 욕실 거울에서 얼굴 반쪽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안면신경마비는 시작일 뿐이었다. 백내장이 심해져 병원 검진을 받자 이번에는 뇌종양이 발견됐다. 아버지는 물었다. "슬픈 소식이 뭐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수술을 해도 종양의 피해를 되돌릴 수 없어요." "내가 좀비가 되는 거냐?"

필립 로스의 아버지 허먼 로스는 그렇게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죽는 것은 일이었고 아버지는 일꾼이었다. 죽는 것은 무시무시했고 아버지는 죽고 있었다."

'아버지의 유산'(문학동네)은 아버지의 죽음을 생생하게 곁에서 목격하게 된 과정을 절절하게 그린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필립 로스(84)의 자전적 에세이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목가' '에브리맨' 등 많은 소설이 국내에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에세이의 국내 출간은 처음이다. '에브리맨'을 통해 비정할 만큼 죽음을 냉정하게 그렸던 필립 로스가 부친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하면서도 따뜻하고 다정하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아들이 노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야기로 여러 의사를 찾아가 검사를 받은 아버지는 끔찍한 수술을 견뎌내지 않으면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허먼 로스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그것은 허먼 로스가 살아오면서 보였던 삶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자신의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은 엄중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해 필립 로스는 죽음이란 한 세계가 끝나는 것임과 동시에 가장 장엄하고도 위대한 전투이며 가장 치열한 형태의 '삶'임을 보여준다. 숭고하기까지 한 죽음과의 사투를 그린 이 에세이를 읽고 나면 그가 왜 마지막 작품인 '네메시스'를 비롯해 말년의 작품들에서 죽음의 여러 얼굴을 반복적으로 다루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뉴욕타임스는 1991년 이 책이 출간됐을 당시 "예측 불허의 천재적인 서사 감각은 신이 필립 로스에게 내린 선물"이라고 호평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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