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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직장 성폭력 퇴치 내건 프랑스 여권 혁명 성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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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스 "사회적, 문화적 인습 뿌리 깊어 성공 쉽지 않을 듯"

(서울=연합뉴스) 유영준 기자 = 할리우드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 사건을 계기로 각국에서 직장 내 성폭력에 대한 주의 환기와 고발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에서도 소셜미디어 등을 주 무대로 직장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항의가 벌어지고 있다.

새삼스럽게 왜 선진국 프랑스 여성들의 항의가 주목을 받느냐고?

그러나 프랑스가 그동안 걸어온 페미니즘에 대한 역사를 고려하면 이러한 변화는 정말 이례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여권(女權)론자이자 철학자인 주느비에브 프래세는 현재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직장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항의 움직임을 '혁명적' 상황으로 규정하면서 1970년대 낙태운동, 1990년 남녀동등임금 운동 등에 비견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프랑스 여성들의 이번 항의 움직임이 영국이나 미국처럼 (직장 성폭력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9일(현지시각) 지적했다.

연합뉴스

"성폭행 감독 폴란스키 회고전이라니"…파리서 반대 시위 [EPA=연합뉴스]



남녀관계를 보는 시각에서 영국이나 미국과 큰 차이를 보이는 프랑스에서 여성들의 항의 움직임은 문화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는 NYT의 분석이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남녀관계에 대해 관대하다. 남녀 간의 사랑을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으로 간주한다. 형식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으며 내용이 중요하다.

직장 상사가 부하 여직원을 성적으로 괴롭히는 것은 중세 시대 영주가 영지내 여성들에 성적 서비스를 강요해온 전통과 동일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특히 정치인이나 고위공직자들의 경우 성(性)스캔들이 터져도 사회적으로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현직에서 물러나지도 않는다.

과거 고(故)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에 2명의 부인이 참석함으로써 둘째 부인과 딸의 존재가 공식화됐으나 비판적인 여론은 없었다.

또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당시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는 정식 부인이 아닌 동거녀였다. 자신이 대표로 있는 사회당의 주요 간부(세골렌 루아얄)가 그의 전 동거인이었다.

프랑스는 남녀관계에서 또 '유혹'을 아주 소중한 요소로 간주하면서 이를 성폭력이나 학대 개념에 대한 대체 요소로 간주한다.

프랑스 중부 앙제대(大)의 여성학자 크리스틴 바르 교수는 이러한 프랑스식 유혹의 이상화(理想化)를 통해 '안티 페미니즘'(반여권주의)이 프랑스 국가정체의 사실상 일부가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사회가 성폭력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길 꺼리는 것은 결국 이처럼 깊게 박혀있는 뿌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미 프린스턴대 조앤 스콧 명예교수는 지적했다.

프랑스와 영미 문화간 우월성 논쟁도 걸려 있다. 유독 이들은 상대방의 문화를 싫어하고 경멸한다. 프랑스식 여권(女權)은 영미식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여기에 영미가 개신교의 청교도적 전통을 가졌지만 프랑스는 가톨릭인 종교적 배경 차이도 있다.

프랑스의 안티 페미니즘은 반미주의와 맥을 같이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에서 직장 내 성폭력 행위가 법적 제재 대상이 된 것은 1992년에서야 이뤄졌으나 그것마저도 내용이 부실해 강력한 집행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성폭력 처벌에 대한 사법 체계도 미비해 효율적인 단죄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성폭력 고발 사건의 93%가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여성들이 직장 성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회 이슈화하고 나서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칫 섣불리 상사에게 보고했다가는 가해자는 남고 피해자만 직장을 떠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지만 프랑스라고 시대적 변화를 마냥 거스를 수는 없다.

한때 국제사회의 화제가 됐던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사건.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이자 차기 프랑스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던 정치인 스트로스 칸은 뉴욕 호텔 여종업원을 성추행했다 결국 IMF 총재직에서 물러나고 대통령의 꿈도 접었다.

사건이 프랑스에서 벌어졌다면 결과가 다를 수도 있었으나 아무튼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전통적 남녀관에 변화의 전기를 가져온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랑을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남녀관계라도 상황에 따라 구분해야한다는 인식 전환의 단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언급한 대로 여권이 영미 수준으로 신장하려면 아직은 요원하다. 사회적 인식도 당장 변화가 힘들고 사법체계를 비롯한 제도적 장치도 미흡하다.

직장 내 문제를 법정에 가기 전 내부적으로 사전 조정해주는 미국의 평등고용기회위원회 같은 기구도 프랑스에는 없다. 여권에 관한 한 프랑스는 후진국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직장 성폭력 문제를 계기로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여권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이다.

yj378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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