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한국군인 환자의 배에서 양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의 회충을 빼냈다는 기록이 있다. 1963년에는 더욱 경악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병원 응급실로 실려온 9살 여아의 배 속에서 무려 1063마리의 회충이 우글거렸다. 여아는 결국 숨졌다. 기생충의 오래된 특징 중 하나는 숙주인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확인된 왕의 미라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미라에서도 어김없이 회충알이 검출됐다. 인분 비료를 준 채소를 먹은 모든 사람은 배 속에 기생충 몇 마리쯤은 키웠을 것이다.
1900년대 중반부터는 전 세계에서 ‘기생충 박멸작전’이 벌어졌다. 기생충학자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의 표현대로 ‘기생충 평등주의’가 무너져버렸고, 기생충은 어느덧 ‘가난한 나라의 질병’으로 남게 되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사람의 몸속에서 그 얼마 안되는 영양분까지 탈취해버리는 ‘치사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귀순한 북한군 병사의 몸에서 수십마리의 기생충이 우글거렸다는 보도가 있었다. 27㎝ 회충의 크기에 집도의조차 크게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회충은 보통 25~30㎝까지 자라기 때문에 27㎝는 유별한 크기는 아니다. 외과의사도 놀랄 만큼 기생충이라곤 보기 힘든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북한군 병사는 인분 비료를 쓴 채소를 섭취했을 것이다. 북한군 병사의 몸이 깡말랐다니 이 회충이 병사의 영양분을 빼앗은 탓이리라. 불현듯 1960~1970년대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해마다 학교제출용 검사용 분변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곤혹스러워했던…. 남과 북한의 시간은 따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판문점 경계선은 시간을 뛰어넘는 선일까?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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