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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외환위기 20년, 스러진 희망은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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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당시 경제부총리로부터 “IMF(국제통화기금)와 자금지원을 협의하겠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연초부터 한보와 기아 등 굴지의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로 쓰러졌습니다. “정부는 IMF에 대가성 차관을 요청키로 했다”는 발표가 나오는 순간 ‘한강의 기적’은 혹독한 구조조정과 실직, 고용 불안정과 양극화라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섰습니다.

20년이 지났습니다. 까마득한 옛일 같지만 외환위기의 상처는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상처를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15일부터 3일에 걸쳐 [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 시리즈를 보도했습니다. 기사를 한 자리에 모으면서, 취재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상과 주제에 따라 하고픈 말이 달랐지만 “바뀌어야 한다”는 건 같았습니다.

[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상)“퇴직금 털어 뛰어든 자영업, 버틸 수 없었다”

“남은 사람들이 잘해서 예전의 제일은행으로 살려내주길 바랍니다.” 명예퇴직으로 회사를 떠나며 남은 이들을 응원했던 제일은행의 여성 행원의 눈물, 20년 전 외환위기의 아픔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눈물의 비디오’의 한 장면입니다. 평생직장을 빼앗긴 첫번째 세대, 그들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1970년 제일은행에 입행했고 40대 중반에 명예퇴직을 당한 이수철씨(64·가명)는 소송 끝에 건진 퇴직금으로 복사집을 시작했습니다. 무급으로 일을 배워 시작한 복사집은 10년 전부터 가까스로 유지돼오다 지난 3월 문을 닫았습니다. 이수철씨는 “외환위기 이후 우리 가족을 먹여살린 기계였는데2주 동안 잠이 오질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이씨 뿐만이 아닙니다. 관료들은 안일했고 재벌들은 배짱을 부리는 사이, 피해는 평범한 직장인들을 덮쳤습니다.

취재를 한 임아영 기자는 “비극을 팔아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 같아 기사를 쓰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워낙 밀려난 사람이 많아 우리는 괜찮은 편’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셨던 취재원들의 의연한 모습에 오히려 더 미안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수만씨(64·가명)는 묻습니다. “지금은 달라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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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상)외환위기 대가는 ‘비정규직 공화국’

외환위기 20년, 한국 경제는 과거의 충격에서 벗어난 듯 하지만 위기는 여전합니다. 외환위기가 ‘위기의 상시화’를 고착화하면서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희망은 꺾이고 있습니다. 기업의 부도로 촉발됐던 외환위기는 ‘가계부채 시한폭탄’으로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20년 전에도 문제였던 재벌 중심 경제체제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공고화됐다.

국민 10명 중 9명은 ‘비정규직 문제 증가’를 IMF 외환위기의 가장 큰 영향으로 꼽았습니다. 안정적인 직업 선호 경향을 낳았고(86.0%), 소득격차를 키웠으며(85.6%), 취업난을 심화시켰다(82.9%)는 반응도 많았습니다.

‘포용적 성장’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날이 갈수록 높아집니다. 기사를 쓴 이윤주 기자는 “지금 위기가 닥친다면 당시 ‘금모으기 운동’ 같은 희생을 발휘할 수 있을까. 공동체, 국가에 대한 의지, 신뢰는 오히려 후퇴하지 않았을까”라고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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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상)외환위기 책임자들 정치권으로, 재계로, 경제관료로…국민 고통과는 괴리된 삶

평범한 직장인들이 외환위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진 것과 달리, 경제 분야 고위 관료의 위기는 잠깐에 그쳤습니다. 강경식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은 정책 실패를 이유로 경질됐는데요. 강 전 부총리는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을 거쳐 농심 사외이사로, 김 전 수석은 2015년 한국무역협회 회장에 오른 뒤 지난달 사의를 표하고 물러난 상태입니다.

강 전 부총리를 대신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임창열 전 부총리는 경기도지사를 거쳐 킨텍스 대표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감 중인 강만수 전 산업은행장은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이었습니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한직을 맴돌다 이명박 캠프 합류로 재기한 뒤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습니다. 외환위기 당시 대책을 주도했던 윤증현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도 2009년 2월 기재부장관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지나온 고통의 터널이 누군가에게는 잠깐 피하면 될 소나기였을까요. 주영재 기자는 “외환위기 당시 고위 관료 3명과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한 명은 바빠서, 두 명은 ‘경제 관련 얘기는 안 하겠다’면서 거절했다. 논란에 입을 다문 모습을 보고 ‘다시 위기가 오면 이들이 솔직히 국민과 소통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습니다.

[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중)신앙이 된 ‘부동산 불패’ 노동 의욕만 떨어뜨려

외환위기로 한 차례 경제가 무너진 뒤, 서민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부동산’이었습니다. ‘땀의 대가’가 ‘땅의 대가’로 바뀌는 동안 부동산 불패는 신화에서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평당 400만원짜리 아파트가 평당 2700만원까지 오르는 것을 경험한 임주은씨(48·가명)는 “은행에 10억원을 넣어도 이자 1000만원도 안 나오는데 누가 은행에 돈을 넣냐”고 반문합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는 자산수익률이 경제성장률보다 커지면서 소득불평등도 심화된다고 했습니다. 자산이 거의 부동산에 집중된 한국은 피케티의 문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입니다. 정부의 고강도 대책에도 부동산 시장은 상승을 이어가고 있는데, 진짜 문제는 세습되는 부동산 자산 가격 상승 속도가 노동소득 증가세를 훨씬 앞지르면서 ‘일하려는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데 있습니다.

박효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대부분 박탈감, 분노,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너무 빠른 부동산 상승속도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만큼 빨리 늘지 않는 노동의 대가다. 땀 흘린 이가 대접받는 나라, 적폐청산만으로는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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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중)일상이 된 정리해고…좋은 직업·배우자 기준도 확 바꿨다

외환위기는 ‘비정규직’과 ‘양극화’라는 씨앗을 한국 경제에 심었습니다. 그 씨앗은 20년 뒤, ‘부모보다 못사는 최초의 세대’로 돌아옵니다.

청·장년을 가리지 않은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임금 격차를 벌려가며 점점 악화되고 있습니다. ‘노동유연화를 통해 위기를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도입된 비정규직은 결국 ‘이윤을 최대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습니다.

불안정 일자리가 늘면서 안정성은 배우자 선택시에도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됐습니다. 1등 신랑감은 대기업 직원에서 공무원·공사 직원으로 바뀌었고 남성 정규직은 비정규직보다 4.6배 결혼할 확률이 높은 사회가 됐습니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 일자리를 늘리려 해도 “국가 재정 파탄난다”는 비판의 목소리는 늘 쏟아집니다. 외환위기가 남긴 트라우마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기사를 쓴 박용하 기자는 “정부는 당장 핸들링하기 쉽다는 이유로 개혁의 시발점을 공공부문으로 봤지만, 정말 공공부문은 변하기 쉬운 곳일까. 외환위기 이후 달라진 대중의 인식, 공공부문의 위상 변화를 감안하면 개혁은 간단치 않을 것 같다. 공공부문이 ‘일자리 증대’의 기지가 되기 전에,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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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 끝나지 않은 고통](하)버티면…‘희망’ ? 버텨봐야…‘희망고문’뿐

20년 전 IMF 세대 졸업자와 2017년 ‘N포 세대’ 졸업자를 만났습니다. 청년들이 마주하는 절벽, 일상이 된 ‘광탈’, 만년 인턴과 불안한 미래는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20년 전부터 기울기 시작한 희망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 정도겠네요.

취업재수생·백수·백조·캥거루족… 외환위기를 겪으며 쏟아졌던 당시 신조어는 20년 뒤 인구론·열정페이·이케아세대·모라토리엄족으로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학점 관리를 하지 않아도, 토익 같은 스펙을 준비하지 않아도 척척 취업하던 때가 있었지만 요즘 청년들은 일본어 1급·중국어 1급·한국사 1급·한국어능력 1급을 갖추고도 밥 먹듯 ‘광탈’ 합니다. 막막함은 일상이 된 지 오래입니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김모씨(25)는 “부모님은 다시 학교 가라고 하시지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습니다. 미래요? 글쎄…”라고 말합니다.

류인하 기자는 “몇 년을 취업에만 매달리며 청춘을 흘려보내는 N포세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노력한 만큼의 최소한의 대가는 돌려줄 수 있어야 국가의 존재 의의가 있지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했습니다. 함께 기사를 쓴 임지선 기자는 “취재를 하며 만난 이들은 모두 유명한 대학에 외국어 능력도 출중한 청년들이었다”며 “확실히 외환위기 이후 문이 좁아졌다는 것, 취업 실패를 개인 능력의 한계라고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느꼈다. 어떻게 하면 청년들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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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20년-끝나지 않은 고통](하) “공평한 교육·소득분배로 ‘가난한 인재’ 살리는 시스템 만들어야”

‘뭔가 잘못됐다’는 인식은 팽배해 있지만, 해법은 요원합니다.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에 어떤 의미였고 어떤 교훈을 남겼을까요. 오늘날 한국 경제는 어떤 난관에 봉착해있나요. 또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도 불확실합니다.

임병용 GS건설 사장은 외환위기 시작부터 이후 20년간 실물경제의 현장을 지켜봐온 이입니다. 현실을 딛고 선 발 때문일까요, 한국 경제의 앞날에 대한 고민도 많았습니다. 5년 전 그가 펴낸 책의 첫머리는 ‘불황은 왜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국제무역을 전공한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오랜 시간 국제경제와 국내 시장을 들여다봐온 경제학자입니다. 보수와 진보의 엇갈린 진단을 균형 있는 자세로 분석해온 송 교수는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해 온 이입니다.

경제 최전선에 선 사업가와 학계에서 한국 경제를 조망해온 연구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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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조형국 기자 situati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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