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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여적]태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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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학도들은 임상실습을 나가기 전 ‘나이팅게일 선서식’을 갖는다. 간호학도들은 ‘나이팅게일 선서문’을 읽으며 “일생을 의롭게 살고, 인간 생명에 해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1820~1910) 하면 ‘백의(白衣)의 천사’가 떠오른다. 하지만 크림전쟁 때 영국군 야전병원에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은 그의 별명은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흰색’이 아닌 짙은 색 계열의 옷을 즐겨 입었다. 성격은 ‘천사’와는 거리가 멀 정도로 직선적이었다. 나이팅게일이 크림전쟁 당시 육군성으로 보낸 편지에는 전장의 섬뜩한 현실뿐 아니라 적들에 대한 격렬한 비난이 담겨 있었다.

한국에서도 간호사들이 ‘백의의 천사’가 아닌 백가지 일을 하는 ‘백(百)의 전사(戰士)’로 불린 지 오래다. 1일 3교대의 불규칙적인 근무여건에다 환자 파악·진료 준비·업무 기록 등으로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게 다반사다. 바쁠 때는 화장실조차 가지 못하거나 평균 6분인 식사시간마저 없을 때가 많다. 무례한 환자들의 성희롱과 폭언을 견뎌내야 하고, 임신 순번과 퇴직 순번도 지켜야 한다. 이런 열악한 노동환경보다 더 간호사들을 옥죄는 것은 이른바 ‘태움 문화’다. ‘태움’은 ‘영혼까지 불태울 정도로 혼을 낸다’는 의미로 직장 내 괴롭힘을 일컫는다.

태움은 간호대학 때부터 시작된다. 신입생은 선배들에게 인사하는 법, 화법과 태도 등을 교육받는다. 일반 병원에서 태움은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이뤄진다. 신입 간호사들은 1~2시간 일찍 출근하고, 퇴근도 늦게 하도록 지시받는다. 업무가 서툴거나 선배 간호사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폭언과 폭행, 집단 따돌림 등을 당하기 일쑤다. 명백한 인권침해 행위다. 성심병원 간호사들이 재단 체육대회에서 짧은 바지와 배꼽티를 입고 걸그룹 춤을 추도록 강요받은 것도 태움 문화의 산물이다. 간호사들은 퇴행적인 태움 문화 근절을 위해 적극 나서야 한다. 간호계에 똬리를 틀고 있는 태움 문화는 흔적 없이 태워버려야 마땅하다. 그게 “일생을 의롭게 살겠다”는 ‘나이팅게일 선서문’을 따르고, ‘백의의 천사’가 아닌 ‘백의 전사’처럼 사는 길이 아닐까.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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