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4 (금)

[별별시선]흔들리는 삶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경향신문

휴대폰에서 내가 설정한 적 없는 커다란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화면을 들여다보니 경북 포항 부근에서 지진이 났다는 문자였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사이 일순간 방이 휘청거렸다. 대피를 하거나 탁자 밑으로 피하지도 못했다. 조금만 더 크게 흔들렸더라면, 아직 읽지도 못한 책들에 깔려 짧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들어가 보니 다들 지진을 느꼈다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사는 서울을 지나서 인천에서도 지진을 느꼈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지진의 여파를 직격으로 맞은 포항에서 글과 사진, 동영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건물이 붕괴 직전까지 무너지고, 낙하물에 맞은 차는 박살이 났다. 대피한 학교 운동장에는 영화에서나 보던 갈라진 틈이 나타났고, 엉망이 되어버린 집들도 여럿이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대부분의 것들은 순식간에 무력해졌다.

다행히도 정부는 신속하고 과감하게 상식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는 지난 수년간의 상처 가득한 교훈들이 무색해지는 행동이 여전히 나타났다. 어떤 학교에서는 대피하려는 학생들을 교사들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교실로 몰아넣었다. 또 어딘가에서는 지진이 지나간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습을 강행하다가 두 번째 지진이 나서야 학생들을 대피시켰다.

교사도 사람이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할 수 있다. 무질서한 대피 때문에 벌어지는 사고를 걱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진이 났는데 학생들의 생명과 안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면 그것은 교육자로서의 책임을 망각한 것이자, 타인의 삶에 대한 모독이다. 비록 한국의 교육환경에서 모든 삶은 소중하고, 입시보다 중요한 것들이 인생에 잔뜩 있다는 말이 얼마나 발붙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들려오는 또 다른 소식에 의하면 지진으로 졸지에 피난민이 된 수험생들이 자기들 때문에 수능이 늦어졌다며 욕하는 인터넷상의 댓글들 때문에 한 번 더 상처를 입고 있다고 한다. 이 역시 뿌리는 같다. 부모, 교사, 모든 사회가 달려들어 대학이 아니면 낙오라는 저주에 가까운 사상을 주입해온 19년의 시간이 일주일이나 연장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저 댓글들은 이기적인 이들의 난동이 아니라, 그들이 받았던 교육의 산물이다. 자기를 너무 사랑하기는커녕, 대입이라는 목표를 제외하면 그 어떤 것의 주체도 될 수 없었던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수능날이 되면 온 사회가 수험생을 응원하고 배려하는 듯 호들갑을 떨지만, 한국 사회는 단 한 번도 태어난 인간을 존재 그 자체로 환영해준 적이 없다. ‘너의 유용성을 입증하라’는 입사 면접과 연봉 협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 학교, 사회의 논리이자, 이제는 우정과 관계의 논리다. 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향해 사회가 파놓은 시궁창을 타고 구정물처럼 혐오가 흐르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행동에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는 저런 괴물을 모른다고 부정하는 것은 학생들의 안전과 생명보다 면학 분위기와 시험 성적을 우선시했던 어떤 교육자들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습 능력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모두가 불행과 불운으로부터 예외일 것이라고 믿고, 타인의 고통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대비를 해도, 삶이 어느 날 갑자기 3초의 시간만을 남겨 주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은 언제든지 폐허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겸손해지고 서로를 돌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삶은 언젠가 뿌리 뽑혀 버릴지도 모른다.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 경향신문 SNS [트위터] [페이스북]
[인기 무료만화 보기]
[카카오 친구맺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