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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책과 삶]권력과 욕망이 뒤섞인 주거의 ‘풍경과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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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의 거주 박물지

박철수 지음 |도서출판 집 | 384쪽 |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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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강맨션아파트. 한강변을 끼고 줄지어 있는 이 5층짜리 아파트는 인근의 초고층 건물과 비교하면 낡고 초라해보인다. 하지만 1970년 9월 준공 당시에는 한국 최초의 ‘맨션’으로 각광을 받았다. ‘신중산층’을 타깃으로 한 27평형부터 최대 규모인 55평형까지 공급한 대한주택공사는 최초로 실물 크기의 견본주택까지 지으면서 분양에 나섰다. 탤런트 강부자와 가수 패티김 등이 입주하면서 한강맨션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한강맨션이 정부가 주도한 첫 아파트 개발은 아니다. 한국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간 이후, 이승만 정권은 수시로 서울시내를 시찰하며 도시 미화와 주택 공급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에서는 상가와 주거공간이 결합된 4~5층짜리 상가주택이 1958년부터 3년간 170여동이나 건설됐다. 현재 서울역과 시청을 잇는 간선 도로변인 남대문로에 빛바랜 유물처럼 남아있는 건물들, 건축가 황두진이 ‘무지개떡 건축’으로 새롭게 주목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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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이승만은 대형아파트 건설을 지시했다. 이승만의 계획은 4·19와 5·16 군사쿠데타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곧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대규모 아파트 단지 개발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승만과 박정희의 구상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고 건축학자 박철수는 지적한다. 이승만이 공공 자금으로 건설하려고 한 반면, 박정희는 국가의 재정 부담 없이 입주민들로부터 선납금을 받아 건설 비용을 충당한 것이다. 철저히 시장 중심적인 접근이다.

한강맨션을 기점으로 아파트는 공공주택이던 것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재화로 변모했다. 1971년 여의도 시범아파트, 반포주공1단지가 차례로 건설되면서 맨션아파트는 중산층의 상징이자 구별짓기의 기제로 자리 잡았다.

이 사실은 정치권력이 얼마나 촘촘하게 우리의 생활세계를 지배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진 법령이나 제도도 짐작 이상으로 우리의 주거 방식을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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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아파트의 ‘필수 옵션’처럼 되어버린 발코니 확장을 보자. 1950~1960년대부터 단독주택에는 서구적 삶의 양식을 응축한 테라스와 선룸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 후, ‘베란다’라고도 불리는 발코니를 하나로 터서 내부공간을 늘리는 일이 보편화됐다. 2005년 10월에는 ‘아파트 발코니 구조 변경 합법화’ 조치가 발표됐다. 저자는 정부의 옹색한 합법화 논리를 조목조목 비판하며, 건설사나 소비자나 전용면적을 더 넓히는 일에 매몰된 세태를 꼬집는다.

발코니 확장과 더불어 아파트 매매의 기준이 되고 있는 ‘대단위’ 단지도 기실 지배층의 치밀한 전략의 소산으로 읽어낼 수 있다. 고도산업화 시기를 지나며 시민들의 주거환경 개선 욕구가 커졌다. 하지만 정부는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높이는 방향 대신 장기융자 제도 등을 통해 아파트를 집단화한 ‘단지 만들기’를 지원했다. 그 결과 조성된 아파트 단지는 “도시 속의 완벽한 요새”(김채원 <푸른 미로>)로, “빗장을 걸어 잠근 이익결사체”로 기능하게 됐다.

우리의 주거문화는 권력과 제도의 산물인 동시에 욕망의 산물이다. 지난해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 정환, 덕선이가 살던 집은 1970년대 유행한 ‘불란서식 미니 2층’ 양옥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허명”에 불과했지만, ‘불란서식’ 집은 서구에 대한 동경 및 외제 선호와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프랑스대사관은 아파트 광고에까지 등장한 ‘불란서식’이라는 문구에 대해 실제 프랑스의 주택과 다르다는 해명글을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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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부동산중개업소로 간판을 바꿔 단 복덕방의 역사도 부동산 불패 신화의 욕망과 궤를 같이한다. 불란서식 주택의 뿌리가 일제강점기 조선에 소개된 ‘문화주택’으로 거슬러올라가듯이, 복덕방 역시 일제 시기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살림집을 알선, 중개해주는 역할을 하던 복덕방은 1970년대 이후 강남 개발 광풍이 불어닥치자 “개발 열기에 편승한 아귀다툼의 현장”으로 변질된다. 박완서는 1975년 쓴 ‘서글픈 순방’에서 부동산 투기가 만연한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보인다.

욕망을 더욱 추동한 것은 시장이었다. 시장은 떠다니는 욕망을 영리하게 이용하면서, 더 부풀어오르게 만들었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때로는 꾸짖음으로 지금보다 더 크고 넓은 집을 소비하도록 이끈다. 문학평론가 김현이 1978년 한 잡지에 ‘알고 보니 아파트는 살 데가 아니더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스물두 평에 처음 발을 디딜 때는 그렇게 적어 보이지 않던 공간이 서른두 평에 다녀온 뒤로는 그렇게 비좁을 수가 없었다.”

주거문화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거나, 다른 모습으로 변이되어 살아남았다. 장독대는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9년 “쥐가 목욕한 간장도 그대로 퍼먹어야 하니 위생상 좋지 않습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는 홍보영화를 만들고, 와우아파트 붕괴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온갖 수난을 겪었지만, 결국 식생활 변화와 김치냉장고 보급으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문화적’ 생활을 위해 도입된 전용 쓰레기 투입구 ‘더스트슈트’도 비슷한 길을 밟았다.

‘식모방’은 1960년대 후반 주문주택이나 민영주택뿐 아니라 30평형대 중산층 아파트에서도 본격 등장했다가, 1980년대 들어서 경제수준과 인건비가 동반 상승하면서 자취를 감춘다.

저자는 그러나 식모와 식모방은 “고시원의 1.5평에서 희망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는 청년들의 다른 이름”이거나 “변기 뚜껑 위에 라면 냄비를 얹어놓고 식은 밥을 말아먹을 수밖에 없는 아르바이트 청년들의 원룸”이 되었다고 통찰한다.

이런 분석은 저자가 지향하는 ‘고현학(考現學·modernology)’과 맞닿아 있다. 고고학과 달리 고현학은 당대의 도시풍속과 세태를 꼼꼼하고 깊게 탐구하는 학문이다. 현재의 풍경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따져묻는 책을 읽는 사이, 1990년대 초반 지어진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에 몇 년간 살았던 1970년대산 아파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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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박물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우리 주거문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자 했다. 각각을 나열하는 대신 서로 연관된 주제를 네 개씩 다섯 꾸러미로 묶어 책의 밀도를 높였다. 일간지 연재물을 토대로 하고 있지만, 연재 분량을 훨씬 넘어서는 분량을 새로 썼다. 관공서 기록물부터 신문기사, 광고, 항공사진 , 설계 도면 등 다양한 자료를 담아냈다. 특히 건축학자의 눈으로 도시와 삶의 공간을 묘사하는 한국 근·현대소설을 불러들이는 솜씨가 탁월하다. 저자가 서문에서 준비 중이라고 밝힌 <한국주택 유전자>가 벌써 기대되는 이유다.

<김유진 기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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