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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friday] 보랏빛으로 물든 들판…햇살 저물자 짙은 와인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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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 '와인 천국'에서의 하루

와이너리 투어 떠나요

메를로·카베르네 등 다양한 품종 포도 '가득'

각각의 샤토 둘러보며 한 모금씩 와인 맛보면 가려졌던 미각 깨어나

때로 여행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아르바이트로 경비를 마련해 그리스 땅을 밟았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고는 영화 속 북유럽에 매료돼 통장을 털어 노르웨이행 항공권을 끊기도 했다. 스페인 문학에 등장하는 새끼 돼지 통구이를 꼭 한번 먹고 싶어 바르셀로나 외곽을 헤매거나 TV에서 녹화 중계해준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의 감동을 몸소 느끼고자 독일에 가는 동안 대출금은 늘어나고, 여행 후 삶이 고달파졌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어쭙잖게 와인에 맛을 들이면서부터다. 내 첫 와인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지인한테 선물 받은 '메독(Me doc)' 와인이었다. 따개가 없어 젓가락으로 코르크를 밀어 넣어 병을 열었다. 어떤 음식과 어울리는지도 몰라 냉장고에서 꺼낸 잡채와 멸치 볶음을 안주 삼았다. 10년 전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저렴한 칠레 와인을 주로 마신다. 가끔 특별한 날에 큰맘 먹고 보르도 와인을 집어 드는데, 그때마다 보르도라는 고장이 궁금했다. 물을 마시며 그 근원을 생각한다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의 자세로 보르도 여행을 꿈꿨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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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의 밤이 와인과 더불어 깊어져 간다. 도시를 메운 가로등 불빛이 취기처럼 몽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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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었는데, 프랑스 파리는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났다. 발목을 스치는 공기가 차가운 아침 6시,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 아래에 있는 호텔에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오스터리츠(Austerlitz) 역까지 갔다. 다시 기차로 4시간을 달려 보르도에 도착했다. 10년 동안 자취방에서 미각과 취기로만 감각하고 상상하던 이국의 포도밭을 직접 거닐 수 있다고 생각하니 몹시 흥분됐다.

와이너리 투어에 참가하기 위해 보르도 관광청을 찾았다. 잘 익은 가을 햇살이 프랑스 남부의 중심 도시에 엎질러지고 있었다. 켄콩스 광장(Place des Quinconces) 분수가 투명한 물꽃을 허공에 피우는 동안 무지개가 언뜻 비치기도 했다. 광장에서 사람들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피크닉을 즐기고, 개와 놀거나 벤치에서 낮잠을 잤다. 시간도, 구름도, 거리를 달리는 차도 다 느리게 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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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스 광장을 비추는 물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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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듀 테이앙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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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를 가로지르는 도르도뉴(Dordogne)강을 기점으로 왼쪽에 위치한 와인 산지를 '레프트뱅크(left bank)'라고 부르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메독 지방의 샤토(Chateau) 몇 군데를 둘러보기로 했다. '라이트뱅크'에서는 '생테밀리옹(Saint-Emilion)'이 유명하다. 출발 시간이 되어 투어 버스에 탔다.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에 끝나는 종일 투어가 따로 있지만, 여행 일정상 6시간 걸리는 반일 투어를 신청했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차창 밖으로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졌다. 포도밭 저편에서 지평선이 마치 잔에 담긴 와인의 보랏빛 물금처럼 일렁였다. 카르미네르,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샤슬리, 카베르네 프랑 등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심은 들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이따금 고풍스러운 회색 고성(古城)과 붉은 장미 화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차창을 열고 숨을 들이켜니 와인을 마시기도 전에 벌써 온몸에 달큼한 취기가 돌았다. "취하라,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던 보들레르의 시구가 떠올랐다. 내게 여행은 지식과 사유보다는 감각적 도취와 만끽으로 기울어지는 축제 행위다.

'샤토 라네상(Chateau Lanessan)'과 '샤토 듀 테이앙(Chateau du Taillan)' '샤토 라 담 블랑슈(Chateau La Dame Blanche)' 등을 차례로 방문하며 포도밭과 고성, 와인 생산 시설과 저장고를 견학하고, 각 샤토의 와인을 시음했다. 라네상 와인이 제일 맛있었는데, 한 모금 마시면 입안에 밑동 굵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일어서고, 은은한 촛불 냄새가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몇 잔 마신 와인에 나른하게 취해 가을볕 아래서 얼굴이 붉게 익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단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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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 라네상에서 와인 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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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를 자극하는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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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도착해 켄콩스 광장 근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소고기 스튜 '뵈프 부르기뇽(bœuf bourguignon)'과 달팽이 요리 '에스카르고(Escargot)'를 보르도 와인과 함께 즐겼다. 식사 후에는 유명한 와인 상점인 '랑탕당(L'Intendant)' 구경을 갔다. 나선형 실내 공간에 1층부터 6층까지 보르도 지방을 대표하는 와인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함을 느끼게 했다.

보르도는 와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중세의 고풍과 젊음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근사한 여행지다. 파리 같은 화려함은 없어도 프랑스 남부 특유의 고즈넉한 낭만 가운데 보르도3·4대학의 현지 학생들과 여러 나라 유학생들이 도시에 활력을 입힌다. 밤이 되니 짙은 와인색 밤하늘 아래 중세 건물의 황금빛 모서리들이 아름다운 야경으로 빛났다. 낮부터 마신 와인의 취기 때문일까. 유럽에서 본 가장 로맨틱한 밤 아홉 시였다.

여행은 일상의 상투성에 길들여진 영혼을 낯선 세계로 내모는 행위다. 권태로운 감각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동과 충격을 받아들여 눈과 코와 입을 갱신하게 한다. 편리하고 익숙한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모르는 눈빛이 도사리는 거리의 이방인이 될 때, 이국 뒷골목에서 상점의 불빛과 음식 냄새와 바이올린 소리, 살갗에 피어나는 두려움과 호기심을 감각으로 전유하는 순간,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의 내면을 변화시킨다. 보르도에서 세계에 대한 내 호기심은 더 깊어졌으며, 테킬라를 마시러 멕시코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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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카르미네르 포도밭이 무럭무럭 풍미를 키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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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교통: 한국에서 보르도 직항편은 없다. 파리를 거치는 에어프랑스 노선과 상하이와 파리를 거쳐 가는 중국 동방항공 노선이 있다. 파리에서 고속 열차 TGV나 일반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 면에서 모두 합리적이다.

축제: ­2년에 한 번씩 프랑스 최대 와인 축제가 열린다. 6월 말에서 7월 초에 가론강변을 따라 와인 부스와 각종 음식점이 줄을 선다. 최근에는 2016년에 개최됐고 다음 축제는 2018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다.

투어: ­와이너리 투어는 보르도 관광청 웹사이트에서 예약할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를 다녀온 후 하루 정도 더 머물면서 지롱드 기념비, 물의 거울, 피에르 다리, 카퓌생 시장, 보르도 시청, 파흘르멍 광장, 그랑 테아트르 등 명소 둘러보기를 추천한다.

숙박: ­고성이나 고택을 호텔로 운영하는 숙박 시설도 색다른 경험. ‘흘레&샤토’(Relais&Chateaux)라는 업체의 웹사이트(relaischateaux.com)에서 예약할 수 있다.

[이병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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