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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정동칼럼]얼마나 더 많은 “미투”가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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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할리우드 굴지의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혐의가 제기된 후 미국에서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미투”(#MeToo) 캠페인이 확산되었다. 유명 배우들과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나도”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음을 토로하며 와인스타인의 행태뿐 아니라 영화계 및 사회 일반의 젠더 불평등과 폭력을 고발했다. “미투” 캠페인은 미국 밖으로도 번져나갔다.

“나도” 피해자인가? 내게 이 질문은 어떤 기억과 묶여 있다. 박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지 얼마 후, 동료들이 여럿 있던 자리에서 남자선배가 물었다. 여자라서 피해 본 적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질문의 불순함이 명백했기에 나는 그 바람직하지 않은 언쟁을 피해보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집요했다. 평탄한 삶을 살아온 나는 그가 보기엔 불평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는 신세 편한 여자였다. 그런 내가 페미니즘 운운하니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대화는 그의 폭언, 욕설로 이어졌고, 분노한 나는 자리를 떴다. 나에게 페미니즘을 언급할 명분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의 생각과 언행이야말로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이유였음을 그가 증명해 보인 셈이었다.

나도 “미투”에 한 줄 보탤 수 있었던 건 분명하다. 중학교 때 버스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가슴을 만진 이래로, 대중교통이나 상점 등 공공장소에서 남자들의 크고 작은 추행은 마흔을 넘어도 계속됐다. 골목길에서 마주친 ‘바바리맨’은 한두명이 아니다. 직장 안팎에서는 나의 여성성을 희화화, 비하하거나 불필요하게 주제로 삼는 발언들을 들었다. 동료 아닌 ‘여자’로 대하는 부적절한 태도는 교묘하고 암묵적이었다.

이런 피해 사례들은 그 정도로 보자면 미미하달 수도 있다. 나는 운이 좋았다. 추행들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진 않았고, 수치심, 공포심, 분노를 나름의 자산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미한 나의 피해마저 대단한 이유는, 이것이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의 ‘최소한’이며 수많은 여성들이 이 정도 일들을 당연한 것,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 여기며 늘 견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가 일상화되는데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멀쩡히 산다. 이 얼마나 병적이면서도 건강한(?), 기이한 현상인가. 그래서 “미투”라는 외침은 무의미하면서도 유의미하다.

집단적 고백의 파급력은 크다. 지난해 문단 성폭력 사태, 영화계와 예술계의 추문에서도 피해자들의 용기가 현실을 고발하는 큰 역할을 했다. 강남역 10번출구 사건 이후에도 많은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침묵을 깨는 행위가 논쟁과 사법절차 등을 거쳐 인식을 변화시키고 풍토를 개선하는 과정은 길고 지난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반복되고, 얼마나 더 많은 여성이 “나도”를 외쳐야 할까. 실제로 피해 여성들의 외침은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7학번인 나는 학내 성폭력 문화를 비판하는 최근 “17학번 김지영들”의 대자보를 보고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다. 지난 30년간 여성들이 똑같은 피해사실을 반복적으로 성토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됐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나도”를 외친다고 가해자 남성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가 여자라서 당한 피해를 증명해 보이라던 선배는, 할리우드 여배우들이나 “17학번 김지영들”에게서 끊임없이 “미투”를 요구하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남성 문화의 일부였다.

남성 문화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도 우리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가 아님을 안다. 여성이 “나도”를 외치지 않아도 문제를 이미 알고 있는 남성들이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남성들 사이의 문화를 내부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와인스타인 추문의 경우, 쿠엔틴 타란티노 등 남자들 몇 명은 알면서도 침묵했음을 밝히고 자성했다. 알면서도 침묵했던 것이 타란티노뿐이었을 리는 없지만, 남성들의 성찰적 고백은 이어지지 않았다. 폭력적 남성 문화의 공고함이 그토록 깨기 어려운 것이기에 남성들의 자각과 노력이 필요하다.

김지영들이 “나도”를 더 외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데 남성들이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촉구한다. 앞서 언급한 선배와의 언쟁에서 나에게 가장 상처가 된 건, 주사나 다름없던 그의 폭력적 언행을 그 자리에서 저지하거나 비판하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남자 동료, 선배들 중엔 좋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마틴 루터 킹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마지막에 기억하는 것은 적이 했던 말이 아니라 친구가 지켰던 침묵이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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