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0 (금)

"박근혜정부 때 신경림·김연수 지원 배제… 블랙리스트 실행 확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노무현 미화 연극' 수정도"

박근혜정부 시절 상부 지시를 받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통보로 작가 신경림·김연수··김애란·박범신·이시영이 한국문학번역원의 해외교류 사업에서 배제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미화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하적으로 묘사했다며 국립극단을 통해 박근형 연출의 연극 ‘개구리’의 내용을 바꾸도록 지시한 정황도 확인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관합동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30일 서울 광화문 KT빌딩에 있는 사무실에서 이같은 내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상조사위에 따르면 한국문학번역원은 2016년 미국 하와이대 및 UC버클리대 한국문학행사에서 김수복·이시영 작가를 지원에서 배제했다. 예산부족이 표면적 이유였으나 조사 결과 번역원 측 담당자가 ‘정부에서 허가를 해주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이라며 ‘이번 정부가 작가 명단을 좀 까다롭게 보고 있다’고 버클리대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일보

2015년 미국 듀크대학에서 열린 북미한국문학행사에서는 역시 상부 지시에 따른 문체부의 불허를 이유로 김애란·김연수 작가가 배제됐다. 2016년 중국 항주 한국문학행사에서는 문체부가 신경림·정끝별·박범신 작가에 대해 ‘불가’를 통보했다. 정끝별 작가의 경우 2014년 문화예술위원회 책임심의위원 선정 과정에서도 ‘제주해군기지 반대·국보법 폐지 등’ 사유로 배제된 바 있다. 한국문학번역원 관련 블랙리스트 실행 사실이 확인된 건 처음이다.

진상조사위의 김준현 진상조사소위원회 위원장(변호사)은 “특정 작가를 지원에서 배제하라는 문체부의 지시가 일상적이고 지속적으로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다”며 “구체적인 배제 사유가 무엇인지, 추가적인 블랙리스트 작동 사례가 있는지 조사를 진행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연극계가 검열에 저항하는 데 촉매 역할을 한 연극 ‘개구리’를 정부가 사전 검열했음을 보여주는 ‘국립극단 기획공연 개구리 관련 현안 보고’ 문건도 처음 공개됐다.

세계일보

2013년 9월 문체부 공연전통예술과에서 작성한 이 문건에는 “일부 정치 편향적이라 오해될 소지가 존재한다”며 “△‘그분(노무현 전 대통령 상징)’과 ‘카멜레온(박정희 전 대통령 상징)’의 대화를 통해 ‘그분’을 미화, ‘카멜레온’을 비하적으로 묘사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을 ‘기말고사 컨닝’으로 풍자”라고 적혀 있다.

이에 따른 국립극단 예술감독의 조치사항으로 “당초 극본 초안에는 그분을 지상으로 모시고 오는 결론이었고 정치적 풍자 및 표현 등이 과도했던 바 연출가로 하여금 결말을 수정토록 하고 과도한 정치적 풍자를 대폭 완화토록 지도하는 등 문제의 소지를 최소화하도록 조치”라고 명시해 놓았다. 진상조사위는 “박근형 연출은 당시 연습 과정에서 국립극단 예술감독과 협의한다 생각했고 검열 정황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문건에는 향후 조치계획으로 “국립극단 작품에 ‘편향된 정치적 소재’는 배제토록 강력 조치·전 국립예술단체 주관 공연에는 정치적 편향의 내용은 배제토록 협조 요청·현 국립극단 예술가독 교체 추진” 등이 적혀 있다.

김 위원장은 “이는 박근혜 정부 초기부터 블랙리스트가 실행됐고, 단순히 지원배제뿐 아니라 작품 내용에 대한 검열까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며 “2013년 국립극단 후속 작품은 물론 이후 전 국립예술단체 공연에 대해 내부 검열 시스템을 운용됐을 가능성이 커 관련 조사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에 박명진 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등 문체부 산하 기관장들이 구체적으로 개입한 정황 역시 확인됐다.

진상조사위는 박 전 위원장이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을 만나 예술 현장의 동향을 보고하고 블랙리스트 관련 현안을 협의한 사실을 보여주는 ‘장관님 면담 참고자료’ 문건을 공개했다. 2015년 10월 박 전 위원장과 문예위 직원이 함께 작성한 3쪽 짜리 문건이다. 박 전 위원장은 블랙리스트 의혹이 처음 제기된 2015년 9월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관련 책임을 부인한 바 있다.

박 전 위원장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내용에는 “다양한 지원방식 구사해서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 잡을 것. 단 운신의 폭을 조금이라도 허용해 주기 바람. 문제 사업 중 10% 정도 허용 등 순혈주의에서 벗어날 필요”라고 요청하는 내용도 담겼다. 또 박계배 전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가 박 전 위원장에게 예술 현장 동향을 보고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김 위원장은 “이 문건은 박 전 위원장과 박 전 대표가 블랙리스트의 실행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관련 사안을 직원들과 협의하며 실제로 집행에 관여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 Segye.com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