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박근혜 신화’의 결말, 그것이 알고싶다

댓글 6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막전막후 166

겨울왕국 엘사일까,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일까

재판거부 정치투쟁으로 지지자 결집 시도하지만

감옥살이하고 국민 외면 속에 외롭게 늙어갈 것


한겨레

박근혜 전 대통령이 8월25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59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사람입니다. 저는 2013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과 국가정보원의 관계를 신화에 빗대어 기사로 쓴 일이 있습니다.

“신화는 이렇게 시작된다. 왕이 있었다. 왕은 괴물을 만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은 왕의 정적들을 잔인하게 물어 죽였다. 왕은 괴물을 곁에 두고 아꼈다. 왕에게는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괴물을 싫어했다. 괴물도 공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괴물이 왕을 물어 죽였다. 공주는 궁에서 쫓겨났다.”

“신화는 계속된다. 괴물은 약간의 개조를 거친 뒤 새로운 왕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괴물은 평민으로 추락한 공주를 감시했다. 공주는 괴물에 대한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신화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공주는 여왕이 됐다. 괴물도 여왕의 소유가 됐다. 괴물은 이빨이 뽑힐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여왕은 괴물의 이빨을 뽑지 않았다. 괴물은 미친 듯이 여왕의 정적들을 물어 죽이기 시작했다. 세상은 다시 공포에 휩싸였다.”

공주와 여왕은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입니다. 괴물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입니다. 이런 비유를 해 본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삶이 워낙 파란만장했기 때문입니다.

간략히 살펴볼까요? 그의 아버지가 쿠데타로 집권해 최고 권력자자 됐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의 첫 번째 딸이라는 의미의 ‘큰영애님’이 됐을 때 열한살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최고 권력자의 딸이나 대통령의 딸은 특별히 이상한 신분이 아닙니다.

한겨레

1977년 8월 당시 부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서예 연습을 받고 있는 24살 박근혜의 모습(왼쪽).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물두살에 그의 운명이 확 바뀌었습니다. 어머니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죽고 그는 국모(國母)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겨우 20대에 사적인 삶의 영역을 거세당하고 유신체제의 중요한 부속품으로 장착된 것입니다. 그는 ‘공산화를 막기 위해 유신을 했다’는 대국민 홍보용 논리를 사실로 굳게 믿었습니다. 순진한 20대의 지력으로는 아버지의 권력욕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뜻대로 결혼을 했더라면 평범한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신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가 갑자기 최측근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고 그는 동생들과 함께 청와대에서 쫓겨났습니다.

이 세상에서 거의 잊혔던 그는 45세에 아버지의 후광으로 정치에 복귀했습니다. 46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52세에 당대표가 됐습니다. 55세에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실패했고 60세에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64세에 국회에 의해 탄핵소추됐고 65세에 탄핵으로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지금 감옥과 법정을 오가며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기간 연장을 계기로 재판을 거부하고 정치투쟁에 나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거나 재판부에 머리를 숙여 선처를 호소할 사람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공주였고 공주는 잘못을 저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까요? 그는 10월16일 법정 발언으로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총궐기’를 주문했습니다. 그 뒤 첫 번째 주말인 21일 오후 서울 마로니에 공원과 서울시청 대한문 앞 등지에서는 평소보다 훨씬 큰 규모의 태극기 집회가 열렸습니다. 연사들은 “박근혜 대통령보다 깨끗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거나 “홍준표가 좌파 권력에 붙어서 박근혜 대통령을 배신했다”고 악을 악을 썼습니다.

그런다고 당장 박근혜 전 대통령이 풀려날 가능성은 물론 없습니다. 앞으로 재판은 어떻게 진행될까요? 그와 함께 그의 지지자들이 펼치는 정치투쟁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까요?

<중앙일보> 고대훈 논설위원이 21일치 신문에 ‘박근혜의 옥중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습니다.

“박근혜는 더 멀리 내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불출석과 증언 거부로 차질을 빚게 된 1심 선고는 2차 구속기한이 끝나는 내년 4월16일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경우 구금을 또 연장하기는 법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유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의 옥중투쟁은 고도의 전략이다. 풀어줄 수도, 가둬둘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뜨리는 승부수다. 그런 ‘박근혜 리스크’를 문재인 정부와 재판부에 던졌다. ‘정치인 박근혜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난다.“

이 글을 읽고 덜컥 겁이 났습니다. <한겨레> 황준범 데스크는 21일치 신문에 ‘박근혜 정치투쟁의 결말은’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습니다.

“그의 정치투쟁은 성공할까? 현재로서 그의 외침은 메아리 없는 초라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유한국당의 출당 조처에 태극기 집회 인원이 잠시 늘어날 수 있지만 국민 다수의 정서와는 괴리된 지 오래다. 정치권에도 ‘박근혜 세력’은 힘이 빠진 지 한참 되었다.

107석 자유한국당이 2012년과 2016년 두 차례의 ‘박근혜 공천’으로 의원 다수가 친박계라고는 하지만 박근혜 출당에 공개적으로 반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정갑윤·최경환·김태흠·박대출·김진태·이장우 의원 등 소수다.

재판을 통해 형이 확정되고, 투옥 시간이 흘러가고 통합 여론이 무르익을 즈음 문재인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단행하는 시나리오가 그나마 실현 가능성 있는 수순일 것이다. 그마저도 박 전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한 여론이 움직이긴 어렵다.”

앞으로 사태는 어느 쪽으로 흘러갈까요? 두 논객의 전망이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지지자들은 점점 더 무리하고 과격한 주장과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국민으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어 갈 것입니다. 강 한가운데 있던 섬이 홍수가 나면 면적이 좁아지다가 물속으로 꼴딱 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두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2014년 1월 개봉한 디즈니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가 당시 박근혜 대통령을 닮았다고 친박 인사들이 주장한 일이 있습니다. 저주에 걸린 공주 엘사가 부모를 사고로 잃고 얼음궁전에 자신을 스스로 유폐하지만 동생 안나의 도움과 희생으로 저주가 풀려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엘사가 얼음궁전으로 떠나며 부른 ‘렛 잇 고’라는 노래의 가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합니다. 친박들의 주장에 대해 당시에도 영화를 사랑하는 누리꾼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더구나 그런 주장이 통하지 않게 됐습니다. 현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엘사처럼 착하지도 않고 안나처럼 도움과 희생을 제공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피 엔딩은 불가능합니다.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이어진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마리오 푸조의 대부’ 시리즈가 있습니다. 마피아 가족의 삶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실상과 허상을 표현한 영화입니다. 저는 3부 마지막 장면을 인상적으로 기억합니다. 마피아의 대부였던 마이클 콜레오네(알 파치노)가 사랑하는 딸을 총격에 잃고 외롭고 비참하게 늙어가는 설정입니다. 바람이 부는 황량한 마당에 앉아 있다가 옆으로 고꾸라져 죽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최후는 그 전에 총에 맞아 죽어갔던 다른 마피아 보스들의 삶에 비해 훨씬 더 비참하고 처량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신화에는 끝이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신화는 어떻게 끝날까요? 겨울왕국처럼 해피 엔딩일까요? 아니면 대부처럼 비극으로 끝날까요? 신화는 이렇게 마무리되지 않을까요?

“여왕에게는 공주 시절부터 가까운 시녀가 있었다. 시녀는 왕궁에 몰래 드나들었고 나라를 주물렀다. 귀족들에게 뇌물도 받았다. 여왕과 시녀의 범죄는 들통이 났고 여왕은 권좌에서 쫓겨났다. 두 사람은 감옥에 갇혀 아주 오랫동안 거기서 살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여왕은 감옥에서 풀려났다. 늙은 여왕은 고향으로 내려갔다. 옛날 지지자들이 가끔 찾아와 여왕을 알현했다. 세상 사람들은 더이상 여왕을 연민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다. 여왕은 그렇게 추하고 처참하게 늙어서 쓸쓸하게 혼자 숨을 거뒀다.”

신화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독재자의 딸이 나라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고 그를 대통령의 자리에 앉힌 것은 바로 우리 유권자들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인정할 줄 모르고 끝까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바로 우리가 지금도 ‘박근혜 신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부끄럽고 서글픈 일입니다.

성한용 선임기자 shy99@hani.co.kr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사람과 동물을 잇다 : 애니멀피플]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체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