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6 (금)

윤동주 문학관 옆 김신조 루트가 … 인왕산·궁궐·서촌 곳곳 ‘알쓸신사’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부암동 허구연' 김병애 해설사

부암동서 옥인발전소까지 2시간

구비마다 숨은 사연 쉼없이 소개

유럽 전문 가이드 출신 이용규씨

스토리가 있는 궁궐·박물관 투어

관련서적 300만원어치 사서 읽어

궁궐 정원 가이드 신지선 대표

창덕궁 부용지 만든 정조의 뜻

풍경보다 그 속에 담긴 마음 읽기

서촌 토박이 가이드 설재우씨

맛집·카페 아닌 오래 쌓인 이야기

수다가 있는 골목 기행으로 재미

토박이도 잘 모르는 서울 알리는 가이드 '어벤져스'


서울 토박이라고 서울을 잘 알까. 주말마다 삼청공원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마셨고, 경복궁 경회루 앞에서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찍었다. 지금은 출퇴근길마다 광화문을 지난다. 그렇게 30년을 살면서 서울을 안다고 생각했다. 일일 투어 가이드를 따라 서울을 다시 보기 전까지. 그날 서울이 다시 보였다.

◆ “조선 중인들의 백일장을 아세요”


중앙일보

‘골목길 해설사’ 김병애씨. [이현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저 나무 뒤로 문 보여요? 저게 북소문, 창의문입니다. 인조가 반정을 일으킬 때 연신내에서 모여 저 문으로 들어왔죠. 또 이괄이 난을 일으킬 때 저 문으로 진입했는데 실패 후 일부 세력이 후금으로 도망쳐 호란의 명분을 제공했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한 거예요.”

서울 종로구 부암동 주민 김병애(70)씨는 6년째 종로구 ‘골목길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를 따라가면 종로구에 살았던 역사의 인물을 만날 수 있다. 그를 따라 윤동주 문학관에 들렀다.

“이 옆 공원 터에 아파트 15개 동이 있었죠. 북한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넘어온 이후에 인적이 없어서 그랬다고 지은 아파트였죠. 높은 곳에 아파트를 만드니 물이 잘 안 나와서 가압장을 만들었다가 아파트 허문 뒤에 쓸모없어졌어요. 그 가압장을 개조해 문학관을 열었어요.”

김씨의 설명은 ‘위항문학길’로 이어졌다. “오늘날 백일장이라고 부르는 글짓기 대회의 기원이 중인들의 시 모임 ‘백전’이죠.”

조선 후기 통신사·사신을 따라 외국을 드나들며 부를 축적한 역관·의원·화가 등 중인 이하 계층이 양반의 전유물이었던 한문학을 즐기기 시작한 게 위항문학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마지막 생애를 보낸 인곡정사 터(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 근처 골목에서는 인왕제색도를 만났다. 김씨의 손끝을 따라 바라본 인왕산 자락이 명작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2시간 남짓, 부암동에서 출발해 인왕산 숲길을 지나 옥인발전소 앞까지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데 고희에 접어든 김씨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다. 길 하나, 풍경 하나마다 다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체력이 예전같지 않아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해설을 맡는다고 했다. 그는 “부암동만 해도 두 번은 돌아야 다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매년 1만 명 이상이 종로 골목길 해설사와 서울 여행을 다녀간다.

◆ “에펠탑만 멋있나요?”


중앙일보

가이드 이용규씨가 지난 19일 일일 투어 참가자에게 경복궁 근정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왕이 업무를 보던 공간인 경복궁 근정전에는 온돌이 없다. 가이드 이용규(36)씨가 “백성들은 헐벗고 가난한데 왕이라고 뜨끈뜨끈한 방에서 일을 할 수는 없기에 온돌을 설치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조선은 검소함을 추구해 궁도 사치스럽지 않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왕이 신하와 백성들에게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켜, 난 짜장면’이라고 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안에 붉은 소나무 기둥 보이시나요? 이음새가 없죠. 전쟁 등 풍파를 겪으면서 국내에는 150년 된 큰 소나무가 남아 있지 않아서 캐나다에서 수입한 소나무입니다.” 가이드 없이 돌아볼 때는 몰랐던 이야기다.

이씨는 유럽 여행 가이드였다. 바티칸 투어, 루브르 박물관 투어 등으로 알려진 ‘자전거나라’ 직원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부터 경복궁과 덕수궁 반나절 투어 프로그램을 열었다. 이씨도 가이드로 프랑스에서 11년, 터키에서 1년 동안 근무하다 지난해 10월 귀국해 한국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쇼핑·옵션 중심의 막연한 한국 여행 문화를 제대로 바꾸는 게 목표다. 이씨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다녀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물이 빗살무늬토기와 주먹도끼라고 하더라. 맨 처음 석기시대 유물이라 기억하고, 그 뒤로 힘이 빠져 다른 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 스스로 어떤 것이 자랑거리인 줄 알아야 역사와 지식 중심의 관광이 발전하고 외국인 상대 프로그램도 바뀔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 가이드 투어가 청년 일자리 창출 효과도 낼 수 있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일일 가이드가 자원봉사하는 해설사 중심이고, 가이드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의식도 없다”고 지적했다. “관광해설이 계속 발전하려면 일일 투어 가이드가 청년들의 일자리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만간 국립중앙박물관 투어 상품도 나온다. 이씨는 “루브르 박물관 가이드를 10년 넘게 해서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준비하니 금속공예·도자기 등은 처음이라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한국 투어를 준비하면서 관련 서적만 300만원어치를 사서 읽었다.

◆ 한국 정원에는 ‘예쁘다’ 이상의 의미


중앙일보

광화문 네거리에서 경복궁의 위치를 설명하는 정원 가이드 신지선씨. [사진 월하당]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같은 궁궐도 테마를 정해 둘러보면 조금 다르게 보인다. 한국정원문화연구소 ‘월하랑’ 신지선(33) 대표는 경복궁·창덕궁 정원투어 가이드다.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그는 현대조경학이 우리 전통과 단절돼 있다는 생각에 한국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신씨는 “유럽의 정원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용이었다면 한국의 정원에는 집 주인의 마음, 가치관이 담겨 있다. 이름, 지당의 위치·규모, 지당 안에 섬 개수, 섬에 심어진 나무 종류 등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궁궐의 정원에는 만든 왕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정조는 즉위 후 5년 만에 창덕궁 부용지를 완성했다. 후원은 왕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정조는 마음이 통하는 신하들을 자신의 정원에 들여 정사를 논했다. 부용지에는 정조의 야망이 담긴 셈이다. “정약용은 훗날 유배지에 다산초당을 짓고 부용지에서 왕과 약속한 정책들을 계속 연구했다. 다산초당의 정원을 보며 부용지를 떠올렸을 터”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정원은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소외돼 있다. 담양 소쇄원의 담벼락을 허물어 버리고 보수공사를 해 문제가 됐던 것이 대표적”이라는 그는 “건축물의 방향, 창을 낸 이유 전부 정원과 관련이 있는데 건물만 덜렁 남기면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달부터는 수도권 민가 정원에서 옛날 선비들처럼 거문고 연주를 듣고, 초대한 이에게 시를 써서 선물하고, 전통주를 마시는 ‘고택정원 낭만산책’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 평범한 동네에도 이야기가 있다


중앙일보

설재우씨가 인솔하는 서촌 여행. [사진 설재우씨]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서촌 토박이’ 설재우(36)씨는 2012년 『서촌방향』이란 책을 내고 독자와의 대화를 겸한 서촌 투어를 계기로 가이드를 시작했다. 온라인 여행 중계 플랫폼을 통해 참가자를 모은다. 월 400~500명이 설씨의 서촌 투어에 참여한다. 서촌 여행의 백미는 골목길이다. 주요 방문지 몇 곳을 뼈대로 상황에 따라, 참가자 구성에 따라 코스가 바뀐다. 어린이가 참가한 날, 근처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날이나 미술관이 휴관하는 날 등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여행 코스를 수정한다.

‘이동 중 수다’도 가이드의 중요한 자질이다. 통인시장 초입에 야채 파는 할아버지가 키우는 강아지 ‘몽이’ 이야기는 설씨의 단골 소재다. 낯선 관광객에게 꼬리를 흔드는 ‘몽이’를 보며 “할아버지가 울릉도에 며칠 내려갔을 때는 시장 사람들이 갖다준 음식도 먹지 않고 할아버지만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하면 참가자들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여행 트렌드 자체가 경험 중심, 친숙함 느끼기로 바뀌고 있는데, 이런 건 여행 고수가 아닌 이상 가이드 없이 느끼기 힘들다”고 말한다. 동네에 익숙한 가이드가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게 하는 것부터가 마음의 벽을 낮춘다. “비단 서촌만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어느 동네나 의미 있다, 우리 동네도 특별하다”는 게 토박이 가이드 설씨의 메시지다.

이현 기자 lee.hyun@joongang.co.kr

▶모바일에서 만나는 중앙일보 [페이스북] [카카오 플러스친구] [모바일웹]

ⓒ중앙일보(http://joongang.co.kr) and JTBC Content Hub Co., Lt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