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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friday] 일렁이는 연못 속 고요한 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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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의 영혼의 미술관] 모네의 '푸른 수련'

조선일보

모네의 ‘푸른 수련’(1916~1919년). 파리 오르세미술관 소장.


미소 지을 일 없을 때, 그건 마음의 고갈이다. 우울은 마음의 물기가 부족할 때 두드러지곤 한다. 이럴 땐 집 앞 호수공원 부안교(鳧雁橋)를 찾는다. 오리와 기러기가 있는 다리란 뜻인데, 실상은 그 다리 아래 수련이 자자하고 그 물가엔 버드나무가 능청스레 때론 처연하게 서 있다. 치렁치렁한 버들가지 끝이 수련잎과 꽃을 간질이듯 늘어뜨려져 있다. 서로에 대한 마중이면서 마실 같다. 이렇듯 어울리는 바가 자연스러우니 모네도 그 정취를 화폭에 거느렸을 것이다.

우울은 수련 연못에 든 빛처럼 낙락하게 굴절한다. 굴절하는 기분을 가져본다는 것, 그건 소소한 일상의 굴레를 타개하는 맛이 있다. 물에 능노는 수련과 물에 다수곳해진 버들처럼 말이다. 호사는 또 하나 있다. 오랜만에 건빵바지를 입는 것. 그 사각 주머니에 진짜 건빵 한 봉지를 넣어왔다. 바람도 없이 수련 잎이 흔들린다. 비단잉어가 왔음이다. 빨갛고 노랗고 희고 얼룩박이인 것. 건빵을 부서뜨려 던져준다. 부스러기를 다투느라 잉어들끼리 공연히 입맞춤하기도 한다. 저 잉어수염이 반갑다.

수련들은 간만에 몸을 푼다. 버드나무도 덩달아 잉어의 소란을 즐긴다. 빛과 바람과 더운 공기가 뒤섞인다. 모종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당신도 그러한가. 내 졸시에는 수련을 일러 '그게 다/ 물로 불을 안치는 뜸,/ 물에 익힌 수련잎 서늘한 불'이라고 했다. 그런 수련 잎 위에 누렇게 물든 잎을 떨구는 버드나무. 물든다는 말은 변화와 동조(同調)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가 된다는 것. 대기의 빛이 수련 연못의 물속에 들어 고요한 탄성으로 변주되곤 한다. 무엇이든 즐거이 반죽하는 것의 바탕은 물이니,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일갈한 노자(老子) 말씀은 아직 여실하다.

그건 수련 혼자만의 파장이 아니라 다른 계절의 빛과 바람과 물, 사람들의 호응이기도 하다. 물듦은 빛의 이동이다. 다른 빛을 살러 가는 것이다. 이 수생(水生)을 연장하는 것이 모네에게 빛의 기억으로서의 수련 연작이다. 수련은 일견 둥근 쪽가위 같다. 물의 심연을 재단하려고 나온 듯 저 수련을 가만 보면 그 둥근 잎의 옆 트임이 사랑홉다. 입만 벌려도 미소가 되는 것. 세상의 모든 구구한 말은 그다음의 사족(蛇足)이어도 좋다.

자연 풍물이나 경물을 그릴 때, 클로드 오스카 모네는 "마치 소경이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처럼" 그리라 주문했다고 한다. 그것이 오직 자연 풍광에만 그러한가. 아니다. 마음도 그 자연의 하나로 격랑과 고요의 심연 위에 일생 수련을 띄우고 산다.

[유종인 시인·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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