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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전문가의 세계 - 문경수의 탐라도 탐험] (3) 화산이 오선지에 그린 음표들…1만8000년 전 ‘놀람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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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학자들의 명소, 수월봉

용암에 화산탄 날아와 박힌 지질층은 흡사 ‘자연음계’

화산분출물 퇴적 과정 보여주는 ‘쇄설층’ 학자들 감탄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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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을 하다 보면 일정과 상관없이 일몰을 늘 염두에 둔다. 탐험할 대상을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 붉은 노을빛에 물드는 자연의 분위기 때문이다. 일몰은 관찰하려는 대상을 아름답게 색칠한다. 특별한 지식이 없더라도 해질녘 자연을 보면 사랑에 빠진다. 어쩌면 탐험은 그렇게 자연과 사랑에 빠져서 비로소 시작된다.

오후 3시가 조금 안됐지만 해가 길어 수월봉을 둘러보기로 했다. 차귀도까지 갈 생각이었지만 차귀도만 둘러보기에도 한나절은 필요해서다. 한림항에서 중문 방향으로 30여분 가면 한경면 고산리 해안가에 수월봉이 있다. 수월봉은 올레길 12코스로 더 유명하지만, 수성화산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남아 있는 오름이다. 해안절벽을 따라 병풍처럼 펼쳐진 화산지층에서 다양한 화산 퇴적구조가 발견돼 전 세계 화산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 우리는 잘 모르는 화산학의 ‘교과서’

수월봉은 또 화산학백과사전에 소개된 국내 유일의 지형이다. 화산학자들에 따르면, 제주를 방문한 외국 지질학자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구조를 갖췄다며 놀란단다. 이런 일화 덕분에 수월봉에 대한 기대감도 커졌다. 수월봉 입구에서 10여m를 걸어가면 푸른 바다와 웅장한 화산쇄설층(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지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보다 현장은 압도적인 경관을 자랑한다. 화산재 지층 아래로 난 탐방로는 제주어로 높은 절벽 아래 바닷가라는 뜻의 ‘엉알길’로 불린다. 엉알길을 따라 유선형으로 휘어진 줄무늬 지층은 투박한 옹기 내부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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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봉은 1만8000여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만든 고리 모양 화산체의 일부다. 화산이 폭발했을 당시 화산 분출물이 어떻게 흘러가며 쌓였는지를 알 수 있는 화산쇄설층이 잘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다. 얼핏 보면 일반적인 퇴적층으로 보일 수 있지만 분출 당시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쌓여 만들어진 지층과 화산탄(화산암괴)이 낙하할 때 충격으로 내려앉은 탄낭 구조가 잘 드러난다. U자 구조로 휘어진 지층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화산탄이 박혀 있다. 화산탄의 크기에 따라 지층이 휘어진 정도가 다르다. 화산탄이 화산쇄설층에 박혀 있다는 건 반대편에서 날아왔다는 뜻이다. 엉알길을 따라 보이는 화산쇄설층은 원형 화산체의 일부분이다.

그렇다면 원형 화산체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에 있는 걸까. 화산탄이 지층에 박힌 각도를 학자들이 분석해보니 모두 차귀도 앞바다를 향하고 있다. 즉 수월봉 화산쇄설층을 만든 분화구는 수월봉과 차귀도 사이에 있는 바다 한가운데인 것이다. 해저분화구가 투수라면 투수가 던진 화산탄을 받은 화산쇄설층이 포수인 셈이다.

수월봉에서는 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지질해설사들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이들 지질해설사의 설명은 수월봉의 형성 과정뿐 아니라 마을에 전해지는 다양한 구전 이야기들,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들을 곁들여 맛깔나다. 그곳에서 해녀 지질해설사 장순덕씨를 만났다.

50년간 해녀로 살아온 그는 몇 해 전 지질해설사 교육을 받았다. 땅 위에 보이는 지질현상을 이해하는 건 어려웠지만, 화산학자들도 본 적이 드문 해저지형이 그에게는 익숙한 풍경이다.

수월봉 화산체의 중심인 차귀도 앞바다는 그의 물질 포인트다. 잠수함을 타고 바닷속 1만5000m까지 내려가는 세상이지만, 바닷속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해녀 중에서도 가장 깊은 수심까지 들어가는 ‘상군’(잠수 깊이에 따라 해녀들은 상군·중군·하군으로 나누기도 한다)에 속하는 그는 물질을 하며 바닷속 희귀 지형을 많이 봤다.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 의문점을 해소하기 위해 지질해설사에 지원했고, 평생 품어온 궁금증이 하나씩 풀리는 경험을 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보다 깊은 바닷속을 즐기려 갖가지 장비를 동원한다. 하지만 장순덕씨에게 잠수 능력은 레저가 아니다. 더 많은 해산물을 채집하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다. 물질은 고된 삶의 일부지만, 바닷속의 세상은 해녀인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세계 최초로 해저분화구 해설사가 되고 싶다는 포부도 내비쳤다. 실제 최근 세계자연유산 10주년 글로벌포럼에서는 제주 해저화산체 보호와 연구에 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해저는 그 특성상 접근이 어려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보존 가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수월봉 정상을 찾기 전에 수월봉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자 길을 나섰다. 엉알길 중간이 험한 지형이라 탐방로가 끊어져 반대편 입구로 갔다. 해변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해산물을 다듬고 있는 해녀들이 보였다. 해녀들이 있는 곳을 지나자마자 화산쇄설층 사이로 물이 흘러내린다. 마치 겨울에 쌓인 눈이 녹아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모습이다.

이 샘물에는 ‘녹고 남매’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오갈피를 찾아 수월봉 절벽에 오른 누이 수월이가 떨어져 죽었다. 이에 동생 녹고는 누이를 잃은 슬픔에 언덕에서 몇날 며칠을 한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두 남매를 기려 이 언덕을 녹고물오름 또는 수월봉이라 불렀다. 이 녹고물은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아래 진흙으로 된 고산층을 투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샘물이다. 천연 정수를 거친 물이라 손으로 받아 마셔도 된다.

엉알길의 끝자락이라 탐방객은 보이지 않는다. 인적이 드물다 보니 탐방로에 갈대가 무성하고 녹고물로 땅은 질퍽했다. 화산쇄설층을 따라 난 검은 모래 해변은 그 자체로 이국적이다. 여기에 다양한 해양생물들도 서식한다. 해변 아래 현무암 바위 지대가 있어서다. 실제 화산쇄설층 틈에 사는 말똥게가 부산하게 들락날락거린다.

문득 하와이 빅아일랜드의 블랙샌드 해변이 떠올랐다. 블랙샌드 해변은 멸종위기에 처한 바다거북이를 볼 수 있다. 거북이는 몸을 데우기 위해 해변으로 나와 일광욕을 즐긴다.

검은 모래 해변을 지나자 수월봉 입구에서 봤던 화산쇄설층과 비슷한 구조의 화산재 지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면 화산쇄설층에 박힌 탄낭 구조가 덜 보이는 대신 기왓장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수평지층이다. 수월봉 지층은 탄낭 구조 외에도 약간 기울어진 지층, 수평으로 발달한 지층, 층리가 발달하지 않은 지층 등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다.

수월봉 같은 수성화산이 바다에서 폭발하면 다양한 화산 분출물이 뒤섞여 사막의 폭풍처럼 지표면을 따라 빠르게 흘러가는 화쇄난류가 만들어진다. 화쇄난류가 흘러가면서 크고 무거운 물질들은 분화구 주변에 모여 층리가 발달되지 않은 지층을 만들고, 분화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입자들이 지표면에 쌓여 층리가 발달한 지층을 만든다.

■ ‘차귀도’ 자연의 거대한 생명력

수월봉 인근에는 제주에서 가장 큰 고산평야가 있다. 가벼운 입자들이 쌓여 만든 토양 덕분에 과거에는 벼농사도 가능했다. 고산지역이야말로 화산활동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 셈이다. 웅장한 지층구조를 한참 보고 있으니 마치 야외음악당에 온 기분이 든다. 화산탄이 날아와 만들어진 탄낭 구조가 마치 자연의 음계를 표현한 것 같아서다. 화산탄의 크기와 날아온 방향은 폭발 당시의 상황을 말해준다. 자연은 어떤 식으로든 이렇게 증거를 남긴다.

엉알길을 뒤로하고 수월봉 정상으로 갔다. 정상에 있는 육각정에 오르자 힘센 바람이 반겨준다. 제주는 바람이 많다. 제주사람들의 삶과 바람, 나아가 태풍은 밀접하다. 그런 점에서 수월봉 정상에 세워진 고산기상대는 중요한 존재다. 제주는 국내 일기예보에 있어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한다. 애잔한 녹고 남매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지역에 국기봉 모양의 기상대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수월봉은 오래전부터 영산제를 지내던 영산이다. 마을의 풍요를 빌며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에 기상대가 세워진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른다.

수월봉에서 바라본 차귀도, 사람이 누워 있는 모습인 와도는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차귀도 역시 네 번에 걸친 격렬한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섬이다. 와도에도 화산체의 중심부로 추정되는 구조들이 남아 화산학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동행한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김완병 박사에게 차귀도의 지명 유래에 얽힌 얘기를 들었다. 송나라 호종단이 제주도에서 인재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수혈자리에 말뚝을 박고 돌아가려 하자 한라산의 수호신이 나섰다. 호종단 일행이 지금의 차귀도를 지날 무렵 매로 변한 수호신이 날갯짓으로 태풍을 일으켜 호종단 일행을 실은 배를 난파시켜 그들의 귀향을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릴 차’(遮)와 ‘돌아갈 귀’(歸)를 써 차귀도라는 지명이 생겼단다. 수월봉에서 보이는 화산체의 일부는 매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매부리 모양의 화산체 아래에는 실제로 매가 둥지를 틀고 있다고 한다.

차귀도는 1977년 이후 사람이 살지 않아 식생이 잘 보존됨에 따라 천연기념물 제422호로 지정됐다. ‘진화론의 성지’로 불리는 갈라파고스섬을 가보진 않았지만 차귀도의 중요성도 새삼 깨닫게 된다.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만 보는데도 차귀도가 발산하는 자연의 거대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사실 수월봉도 미처 그 본모습을,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수월봉 탐험은 온몸으로 제주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수월봉을 내려오는 길, 차귀도의 은은한 생명력과 더불어 수월봉의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필자 문경수

경향신문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과학동아’에서 기자로 일한 과학탐험가다. 지난 10여년간 과학을 주제로 서호주·몽골·알래스카 등 지질학적 명소들을 탐험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NASA 우주생물학그룹과 과학탐사(2010년)를 했고, <효리네민박>(JTBC), <스페이스오디세이>(KBS), <세계테마기행>(EBS)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35억년 전 세상 그대로>가 있다.


<문경수 과학탐험가 ·사진 | 김완병·문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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