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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0 (목)

[이훈범의 시시각각] 성한 것 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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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것은 이참에 확실한 분리수거를

수는 적어도 싱싱하면 유권자 몰릴 것

중앙일보

이훈범 논설위원


“소크라테스 선생, 당신은 유모가 필요한 것 같네요.” 소피스트 철학자 트라시마코스가 코웃음을 쳤다. 소크라테스는 막 “의사가 자신 아닌 환자에게 유익한 처방을 내놓듯 치자는 자신이 아니라 피치자에게 유익한 통치를 한다”고 주장한 참이었다. 갸우뚱하는 소크라테스에게 트라시마코스가 대답한다. “당신이 코 흘리는 것도 모르고 떠드는 철부지 같아서요. 양치기가 양떼를 위해 양을 살찌우나요?”

플라톤이 『국가』에서 들려주는 얘긴데, 서른 살짜리가 자기보다 스무 살이나 더 많은 이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 한다고 비웃는 것이다. 결국 털을 깎고 고기를 팔아 양치기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양떼를 돌보는 게 아니냔 말이다. 이처럼 트라시마코스에게 “정의는 곧 강자의 이익”일 뿐이다. 지배자란 자기 이익에 맞도록 법을 정해 놓고 피치자가 지키면 상을 주고 어기면 벌을 준다는 거다.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는 통렬하다. 현실적이어서 더욱 그렇다. 기원전 5세기 얘긴데도 여전히 솔깃하게 들린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다를 게 없다. “정의롭지만 무질서한 사회와 정의롭지 않지만 질서 있는 사회 중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헨리 키신저의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우리는 이 말들이 궤변임을 안다. 양을 사랑하지 않고 주머니만 생각하는 양치기의 나라는 고기 무게를 속여 팔아도 아무 말 못하는 참주국(僭主國)일 뿐이며, 키신저의 나라는 불의한 권력으로 질서가 강요된 독재국가일 따름이다.

이들 논리에 맞서 소크라테스가 철인(哲人) 군주가 지배하는 이상국가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게 『국가』의 내용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장황하고 따분하다. 비약도 있고 때론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책을 읽다 보면 그가 왜 아테네 사람들의 미움을 사 독배를 마시게 됐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옳은 소리는 듣기 싫은 법이다. 오늘날에도 그렇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전쟁에 이기기 위한 불의라도 말이다.” 이건 알베르 카뮈의 말이다.

2500년이 지나도록 달라지지 않은 논쟁을 굳이 꺼낸 이유는 눈앞에서 그런 일이 또 벌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도 장황하게 한 것은 어차피 설득되지 않을 주장을 구차하게 길게 펼치기보다 그저 보여주고 싶어서다. 바른정당의 ‘자강-통합’ 논쟁 말이다. 명분과 실리의 싸움이라지만 여기서 실리는 양치기의 이익이다. 보수가 분열해서는 진보에 맞설 수 없다는 게 통합파의 논리라는데, 그렇다고 박차고 나올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과 합쳐도 좋다고 어느 보수 유권자가 허락했는지 숱한 질문을 받았을 터다.

결국 의원 자신들을 위한 통합인데 자기 살길 찾기 바쁜 이들에게 정의와 명분을 얘기해봐야 설득이 될 리 없다. 이참에 갈라서는 게 낫다. 어차피 지난번 1차 탈당 때 여론 눈치 보며 주저앉았던 이들이다. 그때 제대로 못했던 분리수거를 차제에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 성한 것을 상한 것과 함께 두면 성한 것마저 상하기 십상이다. 상한 것 골라내고 남는 게 별로 없어도 괜찮다. 소비자들이 대형마트를 찾는 건 물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싱싱해서다. 대형마트에 상한 것만 쌓여 있다면 소비자들은 싱싱한 물건이 있는 집 앞 가게로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러면 물건 수도 많아지는 게 이치고 순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유권자들이 원하는 건 수가 아니라 싱싱함이다. 정의와 명분이란 말이다. 역사가 트라시마코스보다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더 기억하는 게 그 증거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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