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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유성운의 역사정치] 고려의 창업주 왕건이 짊어진 토호 정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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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토호와 손 잡았던 왕건

혼인과 고구려 계승 내세워 집권

연대는 단기간 효과와 후유증 있는 '약'

호남과 손잡은 안철수도 난관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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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가 제작한 왕건의 초상화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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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③
창업주나 건국 시조라고 해도 ‘자리’와 ‘권력’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사극에서 고대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른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고조선이나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의 상황을 보면 그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오히려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유지하기 위해 토착 세력과의 연대에 골몰했습니다. 이때문에 사관(史官)들은 사서(史書)를 만들 때 건국 시조의 위엄이 유지되도록 이런 부분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 중 하나였습니다.

예를 들면 서라벌 6촌의 촌장들이 알에서 깨어난 박혁거세를 극진히 길렀다고 하는 식입니다. 설마 정말로 알에서 깨어난 아기를 양육한 뒤 자신들의 왕으로 삼았을까요. 학계에서는 건국 과정에서 서라벌에 들어온 외부세력(박혁거세)이 토착세력(6촌)의 도움을 받는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00년 전 건국은 판타지가 섞인 설화처럼 윤색됐지만,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왕건이 겪었던 사례는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습니다.

고려의 건국은 왕건이 처했던 세 가지 딜레마를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려는 이런 과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수성(守城)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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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성씨의 본거지.박씨의 조상인 박혁거세의 알이 발견됐다는 신화가 서린 나정.[사진제공=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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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호세력과 연대가 필수였던 왕건
『고려사』와『고려사절요』를 보면 왕건은 당초 왕에 오르겠다는 계획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자력으로 왕위에 오르기도 어려운 처지였죠. 그래서 신숭겸ㆍ배현경ㆍ홍유 등이 궁예를 처단하고 추대했을 때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부인 유씨(신혜왕후)가 갑옷을 입혀주며 설득하자 그제서야 행동에 나섰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918년 고려를 건국했지만 앞길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지방 세력을 제압할만한 군사력도 없었고, ‘살아있는 미륵불’을 자임했던 궁예 같은 카리스마도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 유력 호족 가문과의 정치적 ‘혼(婚)테크’였습니다.

왕건은 신혜왕후 유씨를 시작으로 29명의 부인을 맞이하며 지역 토호들을 우호세력으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후백제와 신라를 무찌를 수 있었던 배경에도 이들로부터 얻은 군사와 군자금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고려와 후백제의 명운을 가른 건곤일척의 승부처였던 고창 전투만 해도 그렇습니다. 고려의 주력군은 왕건의 부대가 아니라 강릉 토호 왕순식과 충주 토호 유권열의 군대였습니다. 유권열 역시 딸을 왕건에게 시집보냈는데, 제3왕후 신명왕후 유씨입니다. 신명왕후는 2명의 왕자 왕요(王堯), 왕소(王昭)를 낳았는데 이들은 제3·4대 왕에 오르게 됩니다.

존립의 조건은 고구려의 계승
궁예는 왜 쫓겨났을까요. 사서에는 신하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까지 죽인 포악한 군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선 역사가 승자(왕건)의 기록이다보니 지나치게 부풀려졌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예컨대 고려사의 권위자인 박종기 국민대 교수는 고구려에 대한 지역정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궁예가 축출된 하나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고도 보고 있습니다.(박종기 저,『고려사의 재발견』)

무슨 이야기일까요?

궁예가 건국한 태봉(후고구려)의 핵심 기반이었던 패서(浿西) 지역은 현재의 황해도 일대로, 옛 고구려 영토였습니다. 패서 지역 토호들은 대개 신라 중앙(경상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서해와 예성강을 이용한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적으로는 풍족한 부를 쌓은 세력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궁예는 자신이 신라의 왕자 출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철원에서 나라를 세웠을 때는 첫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지었습니다. 패서 호족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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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에서 궁예 [사진 KB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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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이후부터입니다. 궁예는 자신의 기반이 다져지자 국호를 고려(901년)에서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바꿔나가며 고구려에 대한 흔적을 조금씩 지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왕건이 새 나라를 세우면서 굳이 궁예가 20년 전 폐기처분한 국호(고려)를 가져다 쓴 것은 이런 배경이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폐주(廢主)가 사용했던 국호를 다시 쓰는 건 무척 이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왕건은 평양을 제2도읍으로 정하는 등 고구려 계승의지를 착실하게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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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서지역


'호남 사위'의 명과 암
29번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호남의 사위’라는 상징성이 강력하게 남았습니다. 왕건이 정치적 기반을 다진 나주 전투 때문입니다.

왕건은 궁예의 명을 받고 후백제의 배후를 치기 위해 전남 나주를 공격했습니다. 나주 전투는 결코 쉬운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후백제에서는 명장으로 손꼽히던 능창이 출전했는데, 그는 어찌나 해전에 능숙한지 '수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건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나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두 가지 요인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왕씨 가문이 예성강 일대에서 해상무역으로 성장한 집안이라는 배경입니다. 왕건은 육상전투보다는 해상전투가 더 익숙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은 그가 궁예 세력으로 들어간 뒤 10여년간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하다가 해전이 중심이 된 나주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고려는 개국 이래 해외 무역을 권장하고, 이슬람 상인들도 드나드는 등 우리 역사에서 가장 해외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됐던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건이 나주를 차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하나는 지역 토호인 나주 오씨 가문의 지원입니다. 호남 지역에 변변한 연고가 없는 왕건으로서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본래 금성(錦城)이라 불리던 이곳은 왕건이 점령한 뒤 나주라고 지명을 바꿨습니다. 이전까지 궁예 수하 중 한 명에 불과했던 왕건은 나주 전투를 통해 전국적 명성을 얻었고, 단번에 서열 2위로 급부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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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출정한 왕건이 샘터에서 빨래하던 장화왕후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을 형상화한 나주시 송월동의 조형물. [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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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오씨 세력과 연대할 때도 왕건은 여지없이 혼테크 전략을 씁니다. 나주 오씨를 이끌던 다련군의 딸은 제2왕후 장화왕후 오씨입니다. 오씨가 낳은 아들 무(武)는 이름만큼이나 싸움을 잘했는데 훗날 고창 전투를 비롯해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일찌감치 태자로 낙점받아 왕건에 이어 제2대 임금 혜종(慧宗)으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도 있었습니다. 나주 오씨 세력은 왕건이 호남에 진출하는 데는 교두보가 됐지만 정작 통일 이후엔 한계로 작용했습니다. 다른 호족들에 비교해 세력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나주가 수도인 개성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점도 약점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왕건은 장화왕후가 임신하는 것을 꺼려 질외사정을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나오기도 합니다. 외가 세력이 허약한 왕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던 탓입니다. 훗날 왕건의 염려는 맞아떨어집니다. 혜종은 왕규의 난을 시작으로 재위 기간 내내 거대 호족 세력에 시달리며 시름시름 앓다가 즉위 6년만에 사망합니다.

이합집산이 끊이지 않는 현대 정치에서도 연대는 세력을 키우기 위한 주요 매개가 됩니다.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임기 초 '레임덕'을 고민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민정·민주·공화당을 묶는 3당 합당을 시도해 이를 극복하려 했습니다. 이른바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 충청의 지역연합이었습니다. 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통해 민정계(대구·경북)의 힘을 얻어 14대 대선에서 숙적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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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218석의 민주자유당 출범. 호남을 제외한 TK·PK·충청의 전격 결합에 ‘3당 야합’이란 비판 쏟아져. 2년 뒤 민자당 김영삼 후보 대선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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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단기간에 힘을 모으는데는 효과적이지만 왕건의 딜레마 같은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합니다. 다양한 이해 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죠.

해방 후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한국 땅에 없는 물적, 인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과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오른 뒤 토지개혁을 실시하려다가 한민당의 극심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정치적 기반이 안정되자 자유당을 창당시켜 한민당과 손을 끊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대통령이 된 뒤, 하나회 숙청 등 민정계를 억누르는 시도에 나섰습니다. 정책은 성공했지만 이에 반발한 민정계 일부와 공화계가 손을 잡고 나가버리죠. 이렇게 만들어진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은 지방선거와 총선에 나서 충청과 경북에서 선전하며 김 전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안깁니다. 비록 축출당하지는 않았지만 궁예가 연상되는 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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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는 보수 진영의 자유민주연합 김종필 총재 및 박태준 전 국무총리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정권 교체에 성공했다. 조건은 공동정부 구성과 내각제 개헌이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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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도 김종필 전 총리와 손잡은 DJP 연합을 통해 15대 대선에서 38만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자민련에 총리 및 장관직을 내주는 것은 물론 한때는 소속 의원을 '꿔주기'까지 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최근 연대의 무게를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는 것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일 것입니다.

21일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가결엔 국민의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의당은 ‘캐스팅 보트’로서의 존재감을 높였지만 안철수 대표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는다는 게 정치권의 해석이입니다. 왜 그럴까요.

안 대표는 21일 대법원장 후보자 인준안 표결을 앞두고 열린 국민의당 의원총회에서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독립적인 사법부를 수호할 수 있는 인물인지’라는 단 한 가지 높은 기준을 적용해서 판단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김 후보자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김 후보자 인준에 대한) 반대로 해석되는데 맞냐”(정동영 의원), “대표의 입장이 모호한데 방향을 정하는 게 리더십”(천정배 의원) 등의 추궁이 이어졌지만 안 대표는 “제가 고민하는 최대치를 말했다. 의원들의 현명한 판단을 믿는다”며 끝까지 얼버무렸습니다.

당내에선 안 대표의 속내가 ‘반대’였을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 것은 당내 상황 때문입니다. 국민의당의 한 관계자는 “안 대표는 자신이 앞장서 인준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는데도, 호남 의원들의 이탈표가 많이 나올 경우, 당 장악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안 대표의 당 장악력이 확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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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2일 대전한밭체육관에서 열린 국민의당 창당대회. 안철수 전 대표와 천정배 의원이 공동대표로 선출됐다.[프리랜서 김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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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출범한 신생정당인 국민의당은 그해 치러진 총선에서 '녹색돌풍'을 일으키며 원내 제3당으로 올라섰습니다. 거기엔 호남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국민의당은 호남 지역을 거의 싹쓸이했고 비례대표에서도 더불어민주당보다 많은 득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안 대표 역시 정치적 보폭이 제한되곤 합니다. 언제나 호남의 의중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에서는 안 대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계승 의지를 밝히는 것도 당내 최대 계파인 호남 세력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안 대표는 지난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며 ‘극중주의(極中主義)’를 내걸었습니다. 그러면서 극중주의의 성격에 대한 논란이 일자 “(극중주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IMF를 3년 만에 극복했을 때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부연했습니다. 또, 지난 8일 광주ㆍ전남지역을 방문했을 때도 ‘김대중 정신 계승’을 재차 강조했습니다. 그는 “우리당의 노선은 중도 노선이다, 한마디로 김대중 노선”이라며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고려 왕조가 토호와의 연대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 틀을 마련한 것은 제4대 광종이 집권한 이후입니다. 이질적인 집단의 물리적 화합이 화학적 화합으로 바뀌는데는 적지 않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안 대표와 국민의당 내 호남세력도 하나의 팀이 되는데는 아직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적어도 김명수 대법원장 인준안 처리 과정에서 비쳐진 국민의당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캐스팅 보트'의 존재감을 과시만 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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