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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표지화가 교체… 야속했던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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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적인 서가] 화가 사석원

20년 전 샘터 그릴 때 동물만 그린다고 중광스님으로 전격교체

새 발행인 야속했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절친

'천일야화' 탐독하며 性에 처음 눈떠 "언젠간 꼭 그리겠다"

손철주의 '흥' 신명나 막걸리 생각나는 짜릿한 독서

대학로의 상징 같던 샘터 사옥 주인이 바뀌었다. '샘터를 떠나는 샘터'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사람 중 한 명이 화가 사석원(57)이다.

피천득 정채봉 최인호 장영희 등 샘터 출신으로 잘 알려진 작가가 한둘이 아니지만, 조금은 다른 장르에서 당대의 인연을 떠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석원은 30대 시절 월간 '샘터'의 표지를 그린 샘터 가족. 대중에게 사랑받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막걸리 연가' '서울 연가' 등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은 내밀한 책 고백, 이번 회 주인공은 화가 사석원이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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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샘터의 숱한 책 중 당신과 인연이 깊은 책은.

"20년 전쯤 나는 월간 '샘터'의 표지를 그리는 화가였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발행인이 나 대신 걸레 스님으로 유명한 중광 스님을 표지 작가로 전격 교체했다. 샘터 잡지가 동물 도감도 아닌데 매달 동물만 그리는 게 못마땅해서였다는 것이다. 나이도 동갑인 발행인이 야속했다. 그 발행인이 지금의 김성구 사장이다. 그런데 몇 년 후 모 기업체 나눔 재단의 이사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여러 번 음주와 여행을 하며 극적으로 둘 사이가 뒤바뀌었다. 지금은 절친이다. 그 후 한 일간지에 '서울 연가'란 제목으로 연재하게 됐는데 매회 김 사장은 감상과 격려를 잊지 않았다. 연재가 끝난 후 같은 제목으로 샘터에서 책으로 발간했다. 우정의 정표 같은 책이다."

2. 읽고 나서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고 생각한 소설이 있다면.

"나이 차 별로 안 나는 고모는 문학소녀였다. 어릴 때부터 같이 살았기에 누나 같은 존재다. 내가 중학생 때 대학생이던 고모 서가에서 두툼한 책 한 권을 은밀히 탐독한 적이 있다. '천일야화' 다. 그 전까지 알고 있던 어린이를 위한 '아라비안나이트'가 아니었다. 처음으로 여성의 성에 눈뜨게 해준 보석 같은 책이다. 지금도 몇몇 구절이 생각 날 정도로 충격적 묘사가 많았다. 매일 밤 전개되는 환상적 이야기는 상상력이 보태져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 수십 년이 흘렀다. '언젠가는 '천일야화'를 그려 봐야지' 하는 계획을 세운 지도 꽤 오래. 아직도 이 계획은 취소되지 않고 진행 중이다."

3. 최근 읽은 책 중 당신을 웃게 만든 책.

"손철주의 '흥'은 참으로 신명난다. 음악이 있는 옛 그림에 관한 책인데 해박하면서도 감칠맛 도는 글맛에 혀를 차며 감탄한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특히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수작하는 남녀를 묘사한 대목은 고상한 멋을 유지하면서도 연애소설보다 더 야릇하다. 예리한 관찰, 남녀의 심정 등이 농익은 필치로 그려진다. 우리 그림이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저자는 단연 이 시대의 풍류 문객이고 구라 중 구라다. 어려운 고전이, 관심 없던 그림이 눈에 들어오고 사랑받게 된다. 시원한 탁주 한 사발 벌컥벌컥 걸치고 싶게 할 만큼 짜릿하다."

4. 최근 읽은 책 중 당신을 울게 만든 책.

"화가의 마지막은 장렬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채 오랜 기간을 보내야만 한다면 최고의 비극. 두려운 상상이다. 이유리의 '화가의 마지막 그림'은 슬픈 책이다. 떠나지 말아야 할 천재 화가들의 죽음에 관한 글이다. 그들은 왜 그렇게 서둘러 떠났을까. 꼭 죽어야만 할 이유는 뭘까. 그리고 무얼 예감하고 무얼 그렸을까. 너무나 아름다운 요즘 하늘과 대비되어 더욱 슬퍼지는 묘비명 같은 이야기다."

5. 당신의 가을을 함께하고 있는 책.

"얼마 전 밤이슬 맞으며 동네 노천 닭 집에서 생맥주를 마셨다. 같이 마신 이는 국립대학 문학부의 교수님과 모 방송국 국장. 그런데 술 취한 그들이 안주 삼아 입에 올리는 이 시대 최고 인물 중에 '백무산'이라는 노동자 시인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이다. 두 사람의 지적 내공을 익히 알기에 부끄러웠다. 취한 채 검색해 본 그는 내가 겉으론 말하지 않아도 속으론 '빨갱이'라고 구획 지은 유형의 인물 같았다. 특히 무산(無産)이라는 이름이 그랬다. 그 후 몰랐다는 열등감 때문에 서둘러 백무산의 시집 세 권을 구해 읽고 또 읽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 시인이 흔히 보여주는 투쟁, 새벽, 자본 등 상투적 구호를 넘어선 무언가가 아스라이 보이는 게 아닌가. 무소유랄까, 해탈이라고 할까. 그의 성찰이 놀라웠다. 거대한 사막을 건너는 낙타 탄 선승같이 느껴졌다. 이 가을은 그의 시 속에서 내 삶을 생각하고 있다."

6. 당신이 타인에게 선물한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 있다면.

일본 사람 아베 나오미의 '도시락의 시간'을 보자마자 갖고 싶었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고 기뻤다. 잊혔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일상이 단숨에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책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도시락과 그 도시락에 얽힌 39인의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 해녀, 승무원, 정비사, 원숭이 조련사, 보험사 영업 사원 등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인생이 녹아있는 것이다. 진실한 인물 사진과 정갈한 음식 사진만으로도 어린 시절의 두근거림을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이 절망의 시대에 사랑과 추억을 되새겨 주는 아랫목에 묻어 둔 밥 한 사발같이 따뜻한 책이기에 기꺼이 벗들과 나누고 있다."

[어수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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