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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국방력 강화 시급한데…방산업체 `적폐 낙인`에 고사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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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들리는 방위산업 ◆

매일경제

토종 방산업계가 연이은 사정당국 조사와 해외 경쟁업체 약진에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남 사천공장 조립라인에서 고등훈련기 T-50이 제작되고 있다. [사진 제공 = 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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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세무당국까지 나서면서 마치 방산기업이 비리집단처럼 돼버렸어요. 당장 다음달 열리는 국내 최대 방산 전시회인 ADEX(국제 항공우주·방위산업 전시회)에서도 보여줄 게 없어요."(방산 대기업 임원 L씨)

"대북 군사자산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 때에 엔지니어 사기가 바닥까지 추락했어요.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비리단체로 매도당하고 있어요."(방산기업 임원 Y씨)

국가 기간산업인 방위산업계가 무너지고 있다. 현 정부가 방위산업을 '적폐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최근 검찰 국세청 등 사정당국의 잇단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밖에서는 해외 방산 공룡이 인수·합병(M&A)으로 몸집을 키움에 따라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21일 국내 최대 방산업체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해외 사업을 총괄했던 김인식 부사장(65)이 경남 사천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업계에서는 검찰이 분식회계 등을 놓고 KAI에 대한 전방위 수사를 벌이던 중에 김 부사장이 큰 압박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공군 조종사 출신인 김 부사장은 척박한 환경에서 이라크에 경공격기(FA-50)를 수출하기 위한 물꼬를 트는 등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KAI 관계자는 "김 부사장이 검찰 수사 대상은 아니었지만 수출 업무 책임자로서 큰 스트레스를 받아온 것으로 안다"며 "최근 주위에 '수출에 힘써 왔는데 파렴치범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억울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위기가 커진 가운데 짙어지는 패배주의가 방산 경쟁력을 갉아먹고 있다. 특히 올해에는 대외 신인도가 추락하며 방산 '빅3' 영업이익률이 3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21일 방산업체 고위 관계자는 "북한 핵·미사일 등 지정학적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데 정작 국내 방산업체 육성책은 보이지 않는다"며 "당장 살아남는 데 급급해 기업들이 중장기 핵심 기술을 놓치고 한국은 해외 방산업체 놀이터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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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방산업계는 '수난의 해'를 맞았다. KAI는 검찰 수사로 사장 공백 사태가 길어지고 있고, 한화그룹 방산 계열사 (주)한화·한화테크윈은 세무조사 폭탄을 맞았다. 여기에 지난달 한화테크윈 계열사인 한화지상방산의 K9 자주포 폭발 사고가 발생하는 등 각종 악재까지 겹쳤다. 실적 타격은 불가피해졌다. 기업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KAI, 한화테크윈, LIG넥스원 등 3대 방산업체의 올해 예상 영업이익률은 5.3%로 2014년(4.2%) 이후 가장 낮은 수준까지 후퇴할 전망이다.

이재우 항공우주학회 부회장은 "국내 방산 신뢰도가 추락하면서 해외 진출은커녕 국내시장에서도 해외 업체에 밀릴 공산이 커졌다"고 진단했다.

한 방산업체 임원은 "최근 위기는 일부 역량 미달 경영자들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더 큰 문제는 방산을 국가기간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정부 차원의 큰 그림이 실종된 가운데 일부 비리가 전체 산업의 비리인 것처럼 인식되면서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당장 신인도에 민감한 수출 전선이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KAI는 검찰 수사로 17조원이 걸린 미국 차기 고등훈련기(APT) 수출이 좌초 위기를 맞고 있다. APT는 미국 공군 노후 훈련기 350대를 교체하는 초대형 사업으로 오는 12월 사업자가 결정될 예정이다.

글로벌 방산기업 관계자는 "미국 입찰 규정상 비리 의혹만으로도 KAI가 받는 영향은 절대적"이라며 "수사 조기 종결 외에 리스크를 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노조까지 나섰다. 류재선 KAI 노조위원장은 "검찰 수사가 장기화할수록 KAI 경영이 어렵게 되고 KAI가 무너지면 대한민국 유일한 항공산업이 사라진다"고 강조했다.

한화도 예외가 아니다. 2001년부터 터키 폴란드 인도 등에 잇따라 진출한 K9 아시아·중동 추가 수출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KAI는 수출 비중이 62%(올 상반기 기준)로 38%인 내수보다 훨씬 크다. 한화테크윈도 전체 매출 중 수출 비중이 49%로 높은 편이다. LIG넥스원은 지난해 6.1%에 그쳤던 수출 비중을 올해 두 배 이상(12.8%)으로 끌어올리며 판을 키우고 있다.

수출 전선의 불안함은 중소 납품업체에 '직격탄'이다. 방산은 폭발 위험성 등으로 인해 수작업하는 공정이 많아 1·2차 납품업체 생태계가 두텁다. 방위산업의 고사 위기는 중소기업 생존, 일자리와 직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KAI 1·2차 협력업체는 161곳에 달한다. 이 중 94%가 중소기업으로 경영 이상이 장기화하면 중소기업이 연쇄 유동성 위기에 빠질 공산이 크다.

북한 리스크가 커지고 있지만 정작 자체 기술 개발 속도가 늦어진다는 걱정도 나온다. 북한 미사일 대응 전력(킬체인)에서 '눈' 같은 역할을 하는 정찰위성 사업이 대표적이다. 정부는 다음달 사업 제안서를 받고 12월 업체를 선정한다는 계획이지만 유력 기술을 보유한 KAI가 경영 공백 상태를 맞으며 사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지 염려된다.

[김정환 기자 /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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