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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이영주 시 '방화범', 이기호 단편 '한정희와 나' 본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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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문학상 후보작>

이영주 - '방화범' 등 10편

방화범

우리가 깊어져서 검게 타들어갈 수 있다면 지금 불을 붙일까? 그녀는 뜨거운 이마를 내 심장에 대고 있습니다. 이것 봐, 너무 깊은 소리가 들리니까 자꾸만 무너져 내려. 나는 양초를 손에 꼭 쥐고 있고요. 언제쯤 밤의 회오리가 끝이 날까요. 불을 붙이면 자꾸만 꺼져 버리는 이상 기후 속에 나는 버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숨이 안으로 안으로 더 숨어 들어가는데 꺼지기 전에 붙일까? 흰 눈이 오기 전에. 그녀는 이미 녹아내리는 손을 뻗어 내 심장 안을 만져봅니다. 이 안에는 뭐가 이렇게 축축한 것들이 잔뜩 있을까. 그녀는 액체처럼 말을 합니다. 흘러내리는 감각. 촛농이 흘러내리는 이것은 불인가요 물인가요. 그녀가 나의 안을 헤집으며 흘리고 있는 물질은. 한밤에 빛나고 있는 이 물질은. 창 안으로 함박눈이 쏟아집니다. 무겁고 무서운 것들이 바닥으로 계속해서 떨어집니다. 우리가 눈 속에서 나갈 수 있다면 이 파티는 시작될 수 있을까요. 깊이를 벗어나 좀 더 가볍게 신발을 벗고 옷을 벗고 뭉개진 자신을 벗고 가장 작은 입자로 둥둥 떠다니다면요. 그녀의 물질이 스며들 때마다 나는 희고 어지러운 백발이 생겨납니다. 나는 양초를 사 모으고요. 불을 붙이려고요. 두 손을 모읍니다. 나는 회오리 속에 남아 계속 버려집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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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1974년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창과 박사. 시집 『108번째 사내』『언니에게』『차가운 사탕들』.

#내가 읽은 이영주 - 송종원 예심위원

이영주 시인의 시는 뜨겁다. 그럴듯한 내면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기보다 내면의 바닥까지 드러내는 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낱낱이 쓰기’, 그리하여 모든 것을 무릅쓰는 방식의 시 쓰기라고 해야 할까. 방점은 견디기에 있다. 시인은 괴물 같은 삶으로부터, 혹은 삶이 건넨 모욕과 치욕으로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며 그것들을 고스란히 견뎌낸다. 이영주 시인은 삶이 결코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늘 결핍을 느끼며 살아갈 뿐 아니라 더 좋은 세계와 관계에 대해 꿈을 꾸기도 한다는 점 역시 시인은 직감한다.

그러고 보면 이영주의 시인의 시 역시 일종의 꿈꾸기인지도 모른다. 가령, 그녀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를 마주하거나 집을 향해 걷지만 끝끝내 집에 도착하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을 만날 때, 나는 거기에서 좀더 나은 꿈을 꾸기 위해 악몽을 몽땅 소진시키려 애쓰는 시인의 모습을 읽는다. 타오르는 것은 악몽이지만 그보다 더 뜨거운 것은 아직 미처 꾸지 못한 꿈의 열기라는 점을 우리는 따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덧붙여 악몽이 타오르는 이영주 시의 자리가 시인 개인의 자리만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나의 꿈과 너의 꿈 사이의 긴밀한 내통에 민감하기 때문에 이영주의 시는 ‘나’와 유사한 고통을 겪는 ‘너’를 밝은 눈으로 찾을 뿐 아니라 ‘우리’라는 말의 가능성까지도 실험한다.

◆송종원

문학평론가.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평론 등단. 고려대 국문과 박사.

<황순원문학상 후보작>

이기호 - '한정희와 나'(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작가로 15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또 써왔다. 어수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도 있었고, 이 세상에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썼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많이 쓰고자 했던 것은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걸 쓰지 않는다면 작가가 또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소설들을 되풀이해서 읽었으며, 주변에 널려 있는 제각각의 고통에 대해서, 그 무게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하고자 노력했다. 그걸 쓰는 과정은 단 한 번도 즐겁지 않았다. 고통에 대해서 쓰는 시간들이었으니까… 어느 땐 나도 모르는 감각이 나도 모르게 찾아와, 쓰고 있던 문장 앞에서 쩔쩔맸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거기에서 빠져나오려고 일부러 책상 옆에서 팔굽혀펴기 같은 것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숙련된 배우와도 같아서 고통에 빠진 사람에 대해서 그릴 때도 다음 장면을 먼저 계산해야 하고, 또 목소리 톤도 조절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그게 잘 되지 않는 고통… 어느 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란 오직 그것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쩐지 내가 쓴 모든 것이 다 거짓말 같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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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1972년 원주 출생. 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최순덕 성령충만기』, 짧은 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사과는 잘해요』. 이효석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수상. 현재 광주대 문창과 교수.

#내가 읽은 이기호 - 이수형 예심위원

이기호의 단편 '한정희와 나'를 읽다 보면, 지명이나 인명 같은 고유명사가 자주 등장하는 누군가의 경험담을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그 때문에 “이거 소설 맞나?”하는 의문을 갖게 되곤 한다. 사전이든 문학 교과서든, 소설이란 허구의 서사(narrative)이며 그런 한에서 예술이라고 일러 왔거니와 이러한 정의가 아직 유효하며 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렇다는 점에서 '한정희와 나'는 소설로서 상당한 결격사유를 노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간을 좀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소설이란 가장 젊은 문학 장르로 기존에 예술이나 문학이 아닌 곳으로까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던, 무엇이든 가능한 글쓰기의 성격을 띠었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새 소설은 젊은 장르에서 노년의 장르로 나이를 먹은 것일까? '한정희와 나'라는 단편이 소설 장르의 갱신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발췌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 언뜻 신변적인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작품에는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간절한 고민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비단 글쓰는 행위에 대한 전문가로서의 고민만이 아니라 전문가이되 또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의 고민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층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수형

1974년 경북 의성 출생. 서울대 국문과.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명지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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