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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최순실의 덫`에 사로잡힌 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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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지고 재계 총수들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갔을 때만해도 분위기가 이러진 않았죠. 대통령을 앞세운 최순실 일가에 이용당한 기업인들을 일종의 '피해자'로 보는 시각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런 인식이 완전히 사라져 안타깝습니다"

국내 대기업의 한 고위임원은 작년 연말 재계총수 청문회 이후 불과 8개월여만에 국민들이 기업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한국 특유의 '반기업정서'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기업들을 국정을 농단한 최순실과 도매금으로 동급취급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서슬퍼런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을 돈으로 매수하겠다던가, 대통령에게 대가를 요구하면서 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간 큰 기업인은 한국에 없다"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삥뜯는' 한국 정치사회에서 누가 버틸수 있겠나. 기업을 최순실의 공모자로 내모는 현실에 비참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실제로 헌법재판소는 지난 3월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문에서도 기업은 이번 사태의 피해자로 봤다. 당시 헌재는 "재단법인 미르와 케이스포츠의 설립, 최서원(최순실)의 이권 개입에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준 피청구인(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위는 기업의 재산권을 침해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업경영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며 기업을 피해자로 판시했다.

하지만 재계는 여전히 '최순실의 덫'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질 못하는 분위기다.

재계가 완전히 움츠러들면서 기업의 목소리를 상시적으로 정부에 전달할 창구가 사실상 사라졌다. 기업들은 "시간이 지난 뒤 정경유착 의혹에 휘말리느니 아예 정권과 접점을 끊어버리는게 속 편하다"며 대관 조직을 없애거나 축소하고 있다. 이런 기업들이 줄잡아 10여 곳에 이른다. 관료들도 오해를 사느니 아예 만나지 말자는 것이다. 4차산업 혁명시대에는 정부와 기업이 영역을 허물고 머리를 맞대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되돌아가는 셈이다. 오해가 두려워, 자칫 불이익을 받을까봐 재계도 관료도 모두 복지부동이다.

기업의 긍정적 활동인 각종 사회공헌 활동도 완전히 위축됐다. 최근 충북지역 수해에도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예년같으면 기업들을 중심으로 성금모금을 비롯한 지원활동이 벌어졌겠지만, 자발적인 사회공헌사업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시각이 많고 이를 논의할만한 대관조직도 사실상 움직이질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사회공헌 활동 관계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적극적으로 얘길 꺼낼 수 있겠냐"고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럴수록 정치권과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이를 해결해줘야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의 한 고위 임원은 "언제까지 기업들을 정경유착의 원흉으로 내몰 것인가. 기업 스스로 바꾸는 것은 한계가 있다. 칼을 들고 있는 정치권과 정부가 같이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18일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특검조사와 관련한 1차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마지막 진술 기회를 얻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판사를 향해 "앞으로 똑같은 상황이 다시 온다면, 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할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며 심정을 털어놓은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사실 살아있는 최고 권력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승마지원과 재단설립에 돈을 내놓으라는 상황에서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경영자는 거의 없다. 정권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에겐 '하명(下命)'을 통해 기업을 언제든지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기가 불편해지면 어김없이 기업과 총수를 겨누는 검찰조사와 국세청 세무조사가 대표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재계와의 소통을 수차례 강조하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의 속내는 좀 복잡하다. 최순실 국정농단은 다른 사람도 아닌 대통령 지시를 따랐다가 벌어진 사태이기 때문이다.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을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 된 셈이다. 역대 정권에서 빠짐없이 등장했던 '정경유착'이라는 적폐가 살아남는 한, 기업들의 '정치 포비아(정치권에 대한 공포감)' 현상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게 재계 전망이다.

국내 5대 그룹의 한 고위임원은 "청와대와 기업 사이의 수직적 관계는 정권이 바뀐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은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며 "최저임금 인상부터 정규직화, 법인세 인상까지 일방통행식으로 하달되는 정책에 할말은 많지만 바짝 엎드려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 심기를 건드렸다가 한순간에 그룹이 와해되고 총수가 구속되는 순간들을 수십년동안 몸으로 배웠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등장하는 다양한 요구에 맞춤형으로 대응하고는 있지만, 정권과 잘못 엮이면 피본다는 두려움도 여전하다"고 덧붙였다.

지난 100일간 보여준 문재인 정권에 재계 시각도 아직은 비슷하다. 지난 5월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한국경영자총협회의 발언을 비판한 것이 단적인 예다. 지난 5월25일 경총 김영배 부회장이 "정규직 전환 요구로 기업이 매우 힘들다"고 말하자, 바로 다음날인 26일 대통령이 직접 나서 "비정규직으로 인한 사회적 양극화를 만든 주요 당사자 중 한 축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유감을 표명했다. 이익단체인 경총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 쯤으로 생각했던 재계는 의외의 상황에 진땀을 흘렸다. 이후 기업들은 앞다퉈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겠다며 로드맵을 발표했다. 정규직화에 따른 경영상 어려움이 뻔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을 때의 보복이 두려운 것 뿐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박근혜 전 대통령이 눈에서 레이저를 뿜으며 상대를 겁박한 것과 다를 게 무언가"라고 반문하며 "기업 입장에서 보면 둘 다 '닥치고 지시대로 따르라'는 하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의 지침에 너무 충실히 따르다가 정권이 바뀌면 '친문 기업'으로 분류돼 경을 칠까 두렵다"는 기업인도 있다.

[송성훈 기자 / 김동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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