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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세상읽기]‘한국 운전자론’이 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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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광복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한국이 운전대를 잡아야 한다는 ‘한국 운전자론’을 거듭 강조했다. 이제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 운전석에 앉아 한·미동맹의 군사행동을 결정해야 한다고 결연히 선언했다. 김정은은 7월4일과 28일에 ICBM을 두차례나 발사하면서 미국에 다시 북핵 문제 해결의 운전대를 잡으라고 협박했다. 이러한 김정은의 계산된 도발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핵공격을 하면 역사상 전례 없는 ‘화염과 분노’를 맞게 될 것이라는 말 폭탄으로 대응했다. 트럼프의 안보 참모들도 번갈아 가면서 군사적 옵션을 배제하지 않고 ‘예방전쟁’도 할 수 있다고 트럼프를 엄호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중거리 미사일로 괌을 포위사격하겠다고 응수하면서 북·미 간에 전쟁위기가 고조됐다. 미국과 북한 간에 ‘말 폭탄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핵 문제는 다시 북·미 간 양자문제로 돌아가 버렸고 한국 주도권 또는 한국 운전자론은 뒤로 밀려버렸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 간의 ‘말 폭탄 전쟁’은 상호자제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대북 강경기조에서 대화무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문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한국의 전쟁결정권을 선언하면서 ‘한국 주도론’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한국 주도론을 살리는 데에는 미국 국무장관 틸러슨이 큰 역할을 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틸러슨은 일관성 있게 대화를 강조하면서 ‘한국 주도론’을 뒷받침해주었다. 8월1일 틸러슨은 ‘4 Nos’를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다고 언명했다. “우리는 정권교체를 시도하지 않으며, 체제붕괴를 추구하지 않고, 한반도의 재통일을 촉진하지 않으며, 우리의 군대를 38선 이북으로 넘어가게 할 구실을 찾지 않을 것이다”라는 틸러슨의 ‘4 Nos’는 문 대통령이 6월30일 발표한 ‘4 Nos’(대북 적대 정책, 북한 공격, 북한체제 붕괴 시도, 인위적 흡수통일 시도를 모두 하지 않는다)와 거의 일치한다. 이는 트럼프 외교정책의 수장인 틸러슨이 문 대통령과 동일한 대북정책 기조를 공유하는 바탕 위에서 대북정책의 주도권 또는 운전석을 문 대통령에게 넘겼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미국이 한국에 북한문제 해결의 운전석을 넘겨준 것은 미국 주도 해결책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북한에 대한 군사행동은 중국과의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선택이기 때문에 미국의 선택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은 경제적 제재와 압박 일변도 정책으로 북한 독재자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밖에 없었으나 수많은 제재가 한번도 작동한 적이 없었다. 북한과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는 중국과 북한의 후견국이 되려 하는 러시아 때문에 대북제재는 작동하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에 새로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소형화, 고도화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주었다.

북핵 문제 해결의 운전석에 앉은 한국에는 많은 장애물이 깔려있다. 가장 큰 장애물은 미국과의 양자 간 거래를 통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는 김정은의 잘못된 전략적 계산이다. 따라서 김정은에게 북·미 간 양자주의 해결책은 미·중 간 갈등을 증폭시킬 것이기 때문에 실현가능한 방책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미국을 대리해서 운전석에 앉은 한국과 대화하여 비핵화와 북한체제 보장을 교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둘째, 중국에 북한을 비핵화하도록 외주(outsourcing)를 주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외주론’은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단견이라고 트럼프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G2 경쟁시대에 북한은 중국에 냉전시대보다 더 큰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독재체제가 붕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도록 외주를 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설득해야 한다. ‘한국 운전자론’은 한국이 외주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데 필수적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아니라 한국 운전자론이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때 한국과 양자협상을 하려 할 것이다. 한국 운전자론에 의거해서 미국은 한·미동맹의 운영에 있어서 전쟁 개전권과 군사행동권과 같은 핵심적인 권한을 한국에 이양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이 운전석에 앉게 된 것은 미국 주도의 제재와 압박이 성공하지 못한 반면, 한국은 경제지원을 통한 유인이라는 햇볕정책의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햇볕정책 2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김정일은 수백만명이 아사하고 쌀 한 톨이 아쉬운 극한 상황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경제원조를 핵심으로 하는 햇볕정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 북한경제는 상당히 높은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 경제원조가 핵을 포기할 만한 유인이 되지 못한다. 김정은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하거나 동결하게 할 수 있는 유인책은 경제원조가 아니라 문 대통령이 베를린 구상에서 표명한 북한체제의 생존보장이다. 김정은은 운전석에 앉은 문 대통령이 보장하는 체제생존에 기초한 한반도평화론을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이고 대화에 응해야 할 것이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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