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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별별시선]래디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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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래디컬(Radical)은 한국어에서 ‘급진적인’ 혹은 ‘근본적인’으로 번역된다. 다소 의아함이 있을 수 있다. 급진적이라는 것은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기보다는 순식간에 도약한다는 의미다. 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가장 기저에 있는 것을 향해 지독스럽게 파고든다는 의미다. 하나는 도약하고 하나는 파고든다. 어째서 둘이 같은 단어의 뜻풀이인 걸까.

래디컬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뿌리(root)다. 줄기나 이파리나 열매가 아니라 뿌리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래디컬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이다. 뿌리는 대체로 땅속에 숨어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성립불가능하다. 게다가 뿌리가 상하거나 뽑히게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에 많은 경우 뿌리는 당연한 것으로, 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며 성역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가끔 그 뿌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왜 같은 인간임에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신분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왜 누군가는 한없이 부유해지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굶주리는지, 단지 성별이나 피부색, 성적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지. 문명이 시작된 이후로도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수많은 것들에 대하여 ‘왜?’라고 묻기 시작했다.

래디컬은 이 의문에 대한 답변을 하려는 시도다. 래디컬은 세계가 드리우고 있는 뿌리가 지배자들의 탐욕과 그것을 위해 자의적으로 조작된 세계관에서 시작된 것임을 폭로한다. 래디컬은 세상과 삶이 꼭 이런 모습이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모습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뿌리를 건드리는 것은 그 위에 있는 것들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필수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과 급진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며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역사적으로 래디컬은 사상, 철학, 운동, 혁명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세상의 대부분으로부터 과격하고, 시기상조이며, 허황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하지만 우연과 필연이 겹쳐 만들어낸 역사의 흐름 속에서 래디컬은 셀 수 없는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간헐적인 승리를 이룩했으며,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들을 남겨두었다. 현실사회주의가 끝나고 자본주의가 세계의 유일무이한 질서였으며, 질서이고, 질서일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에도 이 질문들은 여전히 순간순간 드러나는 위기와 균열들의 틈에서 불온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래디컬을 철 지난 옛 노래로 치부하고, 한편에서는 단지 그것의 과격성만을 답습하며 래디컬이 갖는 상징성을 기만적으로 취하려 한다. 전자를 받아들이려면 여전히 세계에 만연한 고통과 모순의 존재를 외면해야 하고, 후자를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이 던지지 않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무시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래디컬에는 많은 급진적이고도 격렬한 생각과 표현들이 포함되어 있다. 때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엄청난 희생을 불러오기도 했으며, 교조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래디컬의 이름을 걸고 벌인 일임에도 파시스트의 난동과 다를 바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래디컬을 옹호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긍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어느 쪽에 있는 것이든 존재하는 모순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래디컬의 정신이다. 과거의 실패와 과오들은 오늘날의 성찰과 학습의 대상이어야 한다.

우리에겐 여전히 래디컬이 필요하다. 타협하지 않되 현실을 직시하는,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들뜨지 않으면서도 다른 세계가 가능할 것이라는 고요한 희망을 놓지 않는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무언가가.

<최태섭 문화비평가 <잉여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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