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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크리틱] 이광수와 이하 후유 / 이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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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겨레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지난 7월22일 도쿄 시내의 한 심포지엄에서 나는 ‘한국에서 본 오키나와’라는 제하의 구두발표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평화운동가인 오다 마코토의 1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 참가자의 면면은 매우 다채로웠다. 일본의 원로 논픽션 작가부터 독일의 평화운동가까지 ‘평화’라는 관점에서 다양한 견해를 제출했던 것이다.

반면, 내가 발표한 내용은 과거 일본의 식민주의 체제와 그것에 직면한 한국과 오키나와의 계몽적 지식인들이 공히 보여주고 있는 인식상의 실패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올해는 장편소설 <무정>의 출간 100주년이기도 한데, 그런 점에서 조선의 경우 이광수를 논의의 대상으로 올렸다. 특히 그의 장문의 논설 <민족개조론>을 소개하면서 그의 뒤틀린 현실인식이 어떻게 일제에의 동화 논리에 포섭되고 말았는지를 분석했다.

오키나와의 경우 이광수와 유사한 계몽적 지식인의 역할을 담당한 것은 이하 후유였다. 그는 학생 시절에는 일본에 의한 오키나와 차별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하기도 하는 등 저항도 했지만, 이후 상경해 도쿄대학을 졸업하고 오키나와로 돌아온 이후에는 적극적인 일본 동화론자로 변모해, 오키나와 민족개조론을 제창했던 사람이다.

이광수는 사립 와세다대학에서, 이하 후유는 도쿄제국대학에서 수학한 식민지 지식인이자, 초기에는 민족 차별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갖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공히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면서 일본으로의 완전한 동화를 주장한 인사들이었다. 나는 그 실패의 의미를 그들이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상대화할 시야를 상실한 것, 문명과 야만의 논리를 빌려 ‘지배민족’과 ‘열등민족’의 위계를 당연시한 것, 항쟁을 통한 독립의 가능성을 체념한 데서 찾았다.

그 후 조선과 오키나와는 어떤 경로를 걸었나. 조선은 독립 이후 분단되었고, 오키나와는 미국의 점령 체제에 있다가, 현재는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일본의 이중식민지 체제와 유사한 ‘구조적 차별’에 여전히 직면하고 있다. 이 각기 다른 두 개의 ‘민족동화론’의 파산을 꼼꼼히 검토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발표를 마쳤다.

행사가 끝난 후 로비에 서 있는데 한 대학원생이 나를 찾아왔다. 자신의 부모 중의 한 분은 재일조선인이며 자신은 류큐대학을 졸업했다, 한국에서도 어학연수를 했으며 현재는 교토대 대학원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하 후유에 대해서는 오키나와에서 얼마간 공부한 적이 있는데 비판론자들이 있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광수에 대해서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평화운동을 하면서 자신은 ‘민족주의’ 문제 때문에 고민스럽다고 말했다. 그 경계나 분리선을 자신은 넘고 싶다고 말하는 듯했다. 평화운동이나 국제연대운동에서 ‘민족주의’라는 용어는 오해되기 쉬운 말이다. 식민지기의 항쟁은 많은 경우 ‘민족주의’를 불쏘시개로 하여 전개되었다. 이는 식민주의적 동화 논리가 ‘지배민족’ ‘열등민족’과 같은 우생학적 담론과 결합되었기에 이를 내파하고자 하는 방법적 수단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제국주의자·식민주의자들의 ‘동화론적 민족주의’다. 식민지기의 ‘일본 민족주의’ 또는 ‘야마토 국민주의’가 그런 게 아닐까.

이에 저항하는 대항적 민족주의는 과연 그것과 동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반강권주의 등의 주체화의 논리를 ‘동화론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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