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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책과 미래] 바보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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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스티브 잡스의 연설로 유명한 말이다. 이 구절을 '바보처럼 우직하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우직(愚直)이라면 '어리석고 고지식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오던 일의 가치를 믿고 꾸준히 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우선 머릿속에 떠오른다. 아마 오랜 시간에 걸쳐 돌 하나하나를 꾸준히 옮긴 끝에 기어이 산 하나를 옮긴 어리석은 늙은이(愚公移山)가 생각나는 게 보통이리라. 동양문화의 유전자에서 '긍정적 바보'라면, 상식적으로 이 사람이 가장 먼저 발현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이 말은 "항상 배고파 하라(Stay Hungry)" 다음에 나오고, 스티브 잡스라면 최고의 혁신 전문가인데, 한자리에 머물러 하던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더욱이 기성사회로 나아가 가능성을 펼쳐야 할 졸업생한테 할 말은 아니다.

신들이 정해준 운명을 거스르면서 스스로 앞날을 정하겠다고 발버둥칠 때, 어리석음은 생겨난다. 그리스인들은 이를 아테(Ate)라고 불렀다. 신의 뜻을 거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 즉 오만(hybris) 때문에 누가 봐도 임박한 파멸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아킬레우스처럼 용맹하고 오디세우스처럼 지혜로운 영웅들이 왜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그들이 우리만 못한 인간이어서 그러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아이아스'에서 소포클레스는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할 사람이 오래 살기를 갈망하는 건 창피한 일"이라면서 "훌륭하게 살다가 훌륭하게 죽는 것이 고귀한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훌륭한 삶에 대한 갈망 덕분에 영웅들은 인간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일을 행하고, 스스로 선택한 모험 덕분에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감내한다.

삼시세끼를 먹는 '지금의 안락'에 붙잡혀서 '더 나은 삶'을 바라지 않는 상태는 노예적이다. 노예의 운명을 벗기 위해 임박한 파국을 예감하면서도 무모한 일에 뛰어들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들이 바로 영웅이다. 그리고 영웅이 맞는 비극을 통해 우리는 어디까지가 인간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

어리석음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어리석음 탓에 인간은 무모해질 수 있고, 무모함 덕분에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바보가 되어라!" 잡스의 이 말은 젊은이들에게 기성에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라는 뜻일 것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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