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민족음악엔 민중의 국제적 연대가 담겼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최유준의 공감하는 서양음악

(12) 낭만주의와 민족음악


산업화와 도시화에 반발한 19세기 낭만주의는 민요와 민속 음악을 핵심적 가치로 삼았다. 애초 서양 근대의 전개 과정에서 민족과 민중은 구별되지 않았다. 민중의 노래인 ‘민요’에 대한 관심에는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가 아니라 인간 이성이 놓치기 쉬운 감성적 차원을 포착하려는 보편적 노력이 배어 있었다.



유럽연합(EU)의 단일 화폐인 유로는 지폐와 동전의 디자인 방식이 각각 다르다. 유로 지폐에는 개별 국가를 표상하는 어떤 이미지도 담겨 있지 않다. 경계를 넘는 자본의 유통과 인적 소통을 상징하는(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아치형 문이나 다리 그림이 유럽 지도와 함께 그려져 있을 뿐이다. 대신 유로 동전은 숫자를 새긴 앞면의 도안은 통일되어 있지만 뒷면은 발행하는 나라별로 서로 다르게 각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나 상징적 건물 등의 도상이 새겨져 있다.

미국의 음악학자 필립 볼먼은 자신의 저서 <유럽적 민족주의의 음악> 서문에서 2002년에 본격 유통되기 시작한 유로 화폐에 대한 감흥을 책의 주제와 연관시켜 풀어놓고 있다. 볼먼은 지폐와 동전이 구별되는 이러한 유로 화폐가 “커다란 모순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유럽과 그 잠재적 전체성 추구”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개별 국가(민족)와, 유럽통합주권에 대한 민족(국가)주의의 잠재적 위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의 음악과 직결되는 문제로, 그는 “유럽의 음악가들이 민족(국가)에 의존하지만 스스로 그 상징적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요컨대 ‘내셔널’(national)과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의 모순적 상호작용이 ‘유럽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이룬다고 하겠다. 후자의 ‘인터내셔널리즘’에서 보편성 추구에 대한 유럽인들의 예민한 감각을 인정한다고 해도 유럽적 민족주의가 너무 쉽게 세계시민주의로 포장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19세기 음악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민족주의를 다루는 서양음악학자들의 편향적인 태도에서도 이 점은 엿볼 수 있다. 그들은 (마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오스트리아의 작곡가들은 하나같이 명실상부한 세계시민주의자들이었다는 듯이) 서양음악사의 ‘주변’에 해당하는 북유럽과 동유럽, 그리고 러시아의 작곡가들에만 한정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적하면서 ‘국민악파’(nationalist school)와 같은 음악적 분파 명칭을 부여해 왔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러시아의 무소륵스키가 자신들이 한 가지 ‘악파’로 묶인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리둥절해하지 않을까?

한겨레

폴란드 화가 마르친 잘레스키의 그림. 1830년 11월 폴란드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직접 겪고 화폭에 담았다. 러시아의 지배에 대항한 이 봉기는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는데,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쇼팽의 연습곡(?tude Op. 10, No. 12)은 이 실패한 혁명에 대한 작곡가의 소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낭만주의와 민요 정신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을 다루는 세 편의 연재 글을 통해 오늘날 익숙해진 음악의 세 갈래를 차례로 거론하려 한다. 지난 연재에서 브람스와 바그너를 중심으로 ‘시민주의(클래식)’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이번 글에서는 ‘민족주의(민속음악)’, 다음 글에서는 ‘대중주의(대중음악)’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음악의 범주는 서양근대음악이 19세기를 경과하면서 낳은 세쌍둥이라고 해도 좋다.

오늘날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개념이 되고 말았지만 ‘민족주의’(nationalism)는 원래 ‘보통사람들’(the people)에 대한 지지와 신념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여기서 ‘보통사람들’이란 시민, 민중, 국민, 민족, 대중 등 조금씩 다른 의미 층위를 가진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수 있지만 사실상 그 모두를 아우른다. 한국어에서 ‘민중’과 ‘민족’(국민)은 각각 국제주의와 일국주의를 내포하는 것으로 구별되어 쓰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정치운동사에서 해묵은 당파적 갈등의 개념적 진원지가 되기도 했지만,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에 시민과 민중(평민)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국민의회’(Assembl?e Nationale)의 명칭에서 보이듯 민중과 민족(국민)은 애초에 구별되지 않았다.

서양의 근대는 민중주의를 내포한 민족주의의 전개 과정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시기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16세기부터 번져 나갔던 종교개혁 운동과 농민봉기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한 중세적 유럽 통합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원심력이 작용했다. 이 점은 음악적인 면에서 루터파 교회의 찬송가(‘코랄’)에 수용된 다양한 민요 선율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18세기 후반 독일의 계몽주의 사상가 헤르더가 “배우지 못한 감각적인 민중(Volk)의 노래”라는 의미에서 ‘민요’(Volkslied)라는 용어를 처음 제시했다. ‘민요’(民謠)라는 한자어 또한 헤르더의 용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결과이며, 이를 1920년대에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수입하여 쓰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세계 각지의 다양한 민요를 수집하여 민요집을 출판했던 헤르더의 문제의식은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를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적 이성과 수학적 합리성이 놓치기 쉬운 인간의 감성적 차원을 포착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거침없는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 대한 반발로서 목가적(牧歌的) 지향을 내포하고 있던 낭만주의 예술사조가 민요의 문제의식과 만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민중의 노래’, 혹은 ‘근원적 자연의 소리’로서 민요와 민속 음악은 19세기 음악적 낭만주의의 핵심적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베토벤이 다양한 유럽 민요들을 100곡 이상이나 편곡한 사실이나, 자신의 여섯 번째 교향곡에 ‘전원’이라는 표제를 붙이고 농촌 풍경을 묘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드보르자크와 ‘아메리카’


서양음악의 민족주의가 현실 정치의 맥락과 연결되어 ‘저항적 민족주의’의 면모로 발휘된 최초의 사례 가운데 하나는 쇼팽의 음악이다. ‘혁명’이라는 부제가 붙은 격정적인 쇼팽의 피아노 연습곡은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여파로 폴란드에서 일어난 민중봉기 사건에 대한 작곡가 자신의 소회와 관련되어 있다. 쇼팽은 마주르카나 폴로네즈와 같은 폴란드 민속 춤곡에 기반한 피아노 소품들을 썼는데, 이는 당시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민중을 음악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적 재현의 새로운 층위가 열린 셈인데, 작곡가 이상으로 음악평론가로서도 활약했던 슈만은 그 정치적 함의를 예민하게 포착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북쪽의 전능한 독재자(알렉산드로 1세)가 쇼팽이 작곡한 마주르카의 단순한 선율 속에 얼마나 위협적인 것이 숨어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당장 이 음악을 금지시킬 것이다. 쇼팽의 작품은 꽃에 파묻혀 있는 대포와 같다.”

1848년의 시민혁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족국가 시대를 연 19세기 후반부터 자국의 전제 정권이나 타민족의 지배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가 표출되었고, 음악에서도 이는 종종 ‘애국주의’와 연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음악적 민족주의는 지구화된 음악시장을 바탕으로 국제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국민악파’의 한 명으로 다루어지는 보헤미아 출신 드보르자크의 경우가 두드러진다. 그는 젊고 가난하던 시절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고, 이때 심사위원이었던 브람스의 소개로 출판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출판사의 주문에 따라 작곡한 작품이 ‘슬라브 무곡’이다. 이미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으로 큰 수익을 얻은 출판사가 흥행을 목적으로 요청한 작품이었는데 드보르자크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겨레

2.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자필 악보의 표지. 맨 위에 ‘신세계로부터’라는 부제가 체코어와 영어로 나란히 적혀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또한 드보르자크는 1890년에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바로 이듬해에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받고 미국의 민족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향했다. 재임 기간 그는 미국을 재현할 수 있는 음악에 대한 작곡을 요청받게 되는데, 이 과제에 부응한 대표적인 곡이 ‘아메리카’라는 부제가 붙은 현악사중주와 ‘신세계로부터’라는 부제가 붙은 9번 교향곡이다. 그가 미국에서 정확히 어떤 음악을 듣고 ‘미국적인’ 음악을 착상해 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흑인 영가나 인디언들의 음악과 같은 미국의 민요에서 근거를 찾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가 미국에 머문 기간은 3년 정도로 짧았지만 20세기 미국음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이 나치주의자들의 문화선동에 동원된 ‘흑역사’가 있듯이 국수주의로 빠질 수 있는 음악적 민족주의에 대해선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19세기 서양음악에서 헤르더가 탐색했던 민요 정신의 보편적 차원과 국제적 연대를 살피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해 보인다.

1991년 당시 한국의 문화부(지금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폴란드의 세계적 작곡가 펜데레츠키로 하여금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위한 교향곡 작곡을 위촉했다. 사전 답사 형식으로 한국에 방문한 그가 채택한 주제 선율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단일 악장으로 완성된 펜데레츠키의 5번 교향곡 마지막 절정부에서 이 주제 선율의 울림은 ‘한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표상하는 동시에 ‘국제적 연대’를 상징한다. 요컨대 서양음악의 민족주의는 보편적 민중주의의 관점에서 폭넓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민족’이 이미 두 나라를 의미하게 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확히 100년 전에 태어난 작곡가 윤이상과 김순남의 ‘민족음악’이 여전히 일부 세력들에 의해 ‘빨갱이의 음악’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최유준 전남대 감성인문학연구단 인문한국(HK) 교수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
[▶ 페이스북] [카카오톡]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