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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문화중독자의 야간비행]흔들리는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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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베스트셀러 작가군에 강석경, 김용옥, 도종환이 등장한다.

강석경은 소설 <숲속의 방>으로 민음사에서 주최하는 제10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다. 김용옥은 <여자란 무엇인가>를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도종환은 사별한 아내를 그리는 작품 <접시꽃 당신>을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다. 그는 1989년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영화 <겨울나그네>가 흥행 돌풍을 일으킨다.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배우 안성기, 이미숙, 강석우가 열연을 펼친다.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은 원작자이자 만화가인 이현세의 유명세와 정수라, 김도향의 주제곡에 힘입어 30만 관객을 동원한다. 영화 원제가 <공포의 외인구단>이었으나 정권에서 ‘공포’라는 표현을 불허했다는 어이없는 일화가 전해진다.

해태 타이거즈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그 해 무려 여섯 명의 1점대 방어율 투수가 탄생한다. 선동열은 방어율 0.99, 24승6패6세이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다. 이후 대학가에서는 ‘학점이 선동열 방어율 수준’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한다. 눈치챘겠지만 이상은 1986년을 장식했던 대중문화 즉 도서, 영화, 프로야구에 관한 기록지다.

프랑크푸르트학파였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1947년 <계몽의 변증법>을 발표한다. 그들은 급격한 과학발전의 부산물인 문화산업의 문제점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각종 대중문화가 자본주의나 전체주의와 결합하여 대중의 눈과 귀를 마비시킬 수 있다는 서늘한 경고였다. 나치당원으로 음악을 통한 히틀러 우상화에 앞장섰던 지휘자 카라얀이 대표적인 예다.

아련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1986년은 허명무실한 해였다. 군부정권이 기획한 우민화 정책인 스크린, 섹스, 스포츠를 상징하는 ‘3S’ 대중문화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광주 민주화운동의 원혼들은 여전히 대한민국 곳곳을 배회하고 있었고, 학생운동은 변함없이 치열했고, 서로가 대통령 후보라고 우기는 거물 정치인들의 힘겨루기는 해를 넘길 기세였다. 술집이나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이 용납되지 않던 숨 막히던 시절이었다.

30년이 지난 2017년 한국의 대중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이젠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나 <우상과 이성>을 동네 카페에서 읽어도 무방하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문공부는 출판 활성화 방안을 통해서 471종에 달하는 도서의 판매금지를 해제한다. 요즘은 광화문광장에서 백기완의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김민기의 ‘아침이슬’을 목청껏 불러도 상관없다. 역시 6월 민주항쟁 직후 방송심의위원회는 방송금지가요 재심의를 통해서 위 노래를 해금한다.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민주화운동의 결정체였던 6월 민주항쟁은 절반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우려했던 대로 김대중과 김영삼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고, 세 번째 군부정권의 탄생을 멍하니 구경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6월 민주항쟁이 남긴 함의는 실로 다양하다. 시민의 곁으로 진정한 대중문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예술가의 권리가 한 뼘 정도는 늘어났다.

1986년 한국의 대중문화를 돌이켜 볼 때 <계몽의 변증법>은 틀리지 않았다. 2016년 말 대한민국 전역을 수놓았던 촛불시위가 없었다면 또 다른 금서목록과 금지곡이 등장했을 것이다. 예술인 블랙리스트는 더욱 기승을 떨쳤음은 물론이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일부 극장에서만 제한상영하는 문화탄압이 발발했을지도 모른다.

계절이 120번 넘게 바뀌었지만 한국인은 작년까지 독재정권의 낡고 부패한 대중문화 통치술이 판치던 1986년과 비슷한 공간에서 숨 쉬고 있었다.

결국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의 맞음이 향후 수십 년간 변함없을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는 정치판이 바뀔 것이다. 형편없는 우민화 정책이 다시 명함을 내밀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목줄을 죄는 살생부가 발톱을 드러낼 수도 있다. 누구의 책임일까. 이는 특정인의 책임이 아닌 모두의 책임이다. 용기 있고 영민한 시민만이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대중문화를 설계할 수 있다. 열쇠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이다.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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