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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김종구 칼럼] ‘세종 이재용’ 대 ‘바보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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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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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재벌기업에 ‘세종 프로젝트’가 존재한다는 말이 나돌던 때가 있었다. 삼성과 현대의 이건희, 정몽구 회장 등은 말하자면 태조(창업주)한테서 왕권을 물려받은 태종과 같은 존재다. 권좌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왕자의 난’을 비롯한 가족 내부의 갈등이 만만찮았던 것도 태종과 비슷하다. 2세 재벌 회장들로서는 자기 아들만큼은 그런 풍파를 겪지 않고 온전히 권좌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자신의 후계자를 세종처럼 추앙받는 ‘성군’으로 만들어 왕국을 화려하게 꽃피우게 하겠다는 꿈과 의지가 ‘세종 프로젝트’라는 말에는 깃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삼성은 그 계획이 중도에서 차질을 빚었다. 이건희 회장은 아들에게 온전히 권좌를 물려줄 채비를 마무리 짓기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세자인 이재용 부회장이 대리청정에 나섰다.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 부회장은 정중동의 행보 속에서도 과감한 기업 인수합병과 비핵심사업의 정리 등 나름의 경영 스타일을 선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삼성 세종’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렇다. 오히려 ‘삼성 총수의 첫 구속’이라는 뼈아픈 기록을 삼성사의 한 페이지에 장식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비극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판단의 미숙함과 내공의 부족, 가신들의 잘못된 보필, 권력과 뒷거래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려는 유혹에의 흔들림 등…. 세종 시대 장영실, 최윤덕, 황희 등 뛰어난 인재들이 나라를 빛낸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주변에는 장충기, 최지성, 황성수 등 성씨는 같지만 왕국의 이름에 먹칠을 한 신하들의 이름만 즐비하다.

하지만 그가 세종이 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겪는 고통과 시련이 당장은 견디기 힘들겠지만 미래를 위한 보약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세상사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 부회장은 뇌물죄 재판을 넘어서 리더로서의 ‘그릇의 크기’ 자체가 총체적 시험대에 올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 사태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자못 실망스럽다. 그를 지배하는 정서는 분노와 억울함, 좌절과 배신감, 보복과 응징 등의 감정인 것 같다. 이 부회장은 구속된 후 한때 “수의를 입고 재판에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국민이 내가 기어이 죄수복을 입은 모습을 보기를 원하는데 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맥락에서다. 주변에서 간신히 말리기는 했지만, 지금의 사태를 바라보는 인식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자신의 구속을 권력-재벌 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국가·사회적 노력의 차원이 아니라, 삼성에 대한 국민의 적대적 정서, 삼성을 어떻게든 거꾸러뜨리려는 세력의 음모의 결과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최순실 게이트를 파헤치는 데 앞장선 언론과 특검 등에 대한 깊은 원한과 보복 심리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런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위태로운 정서는 삼성 내부를 향해서도 나타난다. 미래전략실을 해체한 것이야 좋지만, 그것이 깊은 성찰과 반성에서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미래전략실 사람들에 대한 인사처리에서도 분풀이식 감정이 묻어난다. 미래전략실 자체가 총수의 전위조직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포용력 있는 리더십, 사람을 아끼고 보듬는 넓은 그릇의 풍모는 엿보이지 않는다. 어느 재벌기업보다 중앙집권적 풍토가 강한 삼성의 기업문화는 고스란히 놓아둔 채 계열사별 자율성을 외치는 불합치와 모순은 더욱 혼란스럽다.

이 부회장의 실망스러운 면모는 뇌물죄 재판에서 취하고 있는 ‘바보 전략’에서 절정을 이룬다. “정유라씨에 대한 지원도, 삼성물산 합병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아랫사람들이 다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원래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바보인 척해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책략을 ‘가치부전’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은 그런 전략에 속아 넘어갈 만큼 사법부도 국민도 바보는 아니다. 오히려 그런 전략은 장기적으로는 경영자로서의 리더십을 좀먹는 바보스러운 선택이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이 부회장에 대한 선고 공판이 일주일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다만, 이 부회장이 ‘세종 이재용’과 ‘바보 이재용’의 중대한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편집인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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