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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1945년 8월15일, '광복' 소식은 어떻게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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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알린 통신수단


아시아경제

1945년 8월 15일 도쿄 주민들이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는 일본왕 히로히토(裕仁·1901∼1989)의 라디오 연설을 무릎꿇고 듣고 있다. 2015년 일본 궁내청은 종전 70년을 맞아 히로히토의 태평양전쟁 항복선언을 디지털로 복원해 1일 공개했다. (도쿄 AP=연합뉴스)


한반도에 '광복'이라는 희소식을 최초로 알린 통신수단은 '라디오'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라디오에서 울렸다. NHK의 아나운서가 "지금부터 중대한 발표가 있겠다"고 말한 뒤 청취자들에게 모두 자리에서 일어설 것을 요구했다.

이어 일본제국 정보국 총재 시모무라 히로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히로시는 "옥음(玉音)을 방송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기미가요가 울려펴졌다. 기미가요가 곧 끝난 후, 대다수의 일본 국민들은 그들이 모시는 일왕의 육성을 처음으로 들었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

이렇게 시작한 육성은 4분37초간 계속됐다.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항복(종전조서)' 낭독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한반도와 일본, 중국, 대만 등지에서 NHK 월드라디오의 전신인 동아방송을 통해 전파됐다.

이 문서는 일본의 패전선언문이었고,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광복 소식은 그렇게 라디오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일왕의 패전선언에도 울려퍼지지 않았던 "대한독립 만세", 왜?
그러나 일왕의 항복선언을 두 귀로 들었음에도, 1945년 8월 15일 한반도에서 "대한독립 만세!"라는 감격의 외침이 울려펴지진 않았다. 일왕의 종전조서는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어체 일본어로 작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열악한 녹음음질과 난해한 한문용어, 히로히토 일왕 특유의 웅얼거리는듯한 목소리로 인해 일본인조차 그 내용에 어리둥절해했다.

일왕의 육성방송 직후 일본인 아나운서가 종전조서를 다시 한 번 낭독했고, 한국인 아나운서가 한국어로 번역한 원고를 또 낭독했다. 그제야 청취자들은 대강의 내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방금전 들은 소식을 '광복'이란 의미로 받아들인 사람은 없었다. 종전조서 그 어느 곳에도 광복은커녕 패전·항복·해방·독립 같은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패전선언 않고 "공동선언을 수락한다"고 에둘러 발표
오히려 종전조서는 '항복문서로의 해석'이 필요한 문서였다.

종전조서 서두부문에 있는 "짐은 제국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토록 하였다"는 내용 중 '수락한다'고 한 것은 '포츠담선언'을 의미한다.

포츠담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이다. 즉 일왕은 직접적인 패전선언 대신,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고 표현함으로써 에둘러 패전을 인정한 것이다.

더욱이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8월15일 이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종전조서 방송 이튿날인 8월16일자 일본 신문에서야 최초로 게재됐다.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종전조서를 들어봐야, 그것이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8월15일의 라디오방송 그리고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담은 16일자 신문을 통해서야 일왕의 종전조서 뜻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곧 조선의 광복을 의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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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일왕의 육성 녹음에 사용된 장비는 NHK 방송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 음반은 1장당 최대 3분 녹음이 가능했고, 4분37초의 일왕음성 녹음을 위해 2장의 음반이 사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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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종전조서는 몇번의 문구 수정후 히로히토 일왕의 재가를 받아 완성됐다. 미리 명령을 받은 NHK 기술진이 일본 왕궁에 임시 녹음시설을 설치했다. 8월 14일 밤 11시 20분부터 히로히토 일왕 낭독 녹음작업이 실시됐다.

당시 녹음에 사용된 장비는 NHK 방송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 음반은 1장당 3분 녹음이 가능했고, 4분37초의 일왕음성 녹음을 위해 2장의 음반이 사용됐다.

또 당시 낭독이 생방송은 아니었다. 당시의 방송시설이 열악했을 뿐만 아니라, 혹여라도 실수(NG)가 발생해선 안됐기 때문이다. 당시 신(神)과 같은 지위에 있던 일왕이 실수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일왕 히로히토는 녹음을 서너번 정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표 기자 letmei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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