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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금)

“한국 방문 100번째 무등산에 묻히기로 결심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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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나고야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

한겨레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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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점이 이 명부에 있어요.”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나고야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마코토(75·사진) 공동대표는 지난 9일 <한겨레> 기자에게 미쓰비시중공업의 내부 서류 복사본을 보여줬다.

나고야 고교의 세계사 교사였던 그는 1986년 전쟁 관련 지역사를 조사하던 중 미쓰비시중공업에서 45장짜리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 서류엔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서 일하다가 1944년 12월 도난카이 대지진 때 숨진 최정례(당시 14살)씨 등 조선인 소녀 6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1988년 7월 말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해 명부 속에 나온 주소지를 찾아 수십일 동안 유족들을 수소문했다. 지난 8일 광주지법에서 근로정신대 강제징용 피해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최씨의 조카 며느리 이경자(74)씨도 그때 처음 만났다.

1987년 ‘조선인 근로정신대’ 첫 확인
미쓰비시중공업 희생 6명 명단 공개
나고야 옛 공장터에 57명 추모비도
“5·18 알린 힌츠페터 같은 활동” 평가


1100여명 시민모임 20년째 소송 지원
“문재인 정부 ‘강제징용’ 해결 기대”


한겨레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가 1987년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받은 45장짜리의 옛 서류에 적혀 있는 대지진 때 사망한 조선인 여성 희생자들의 이름. 정대하 기자


다카하시 대표는 지난 6일 일본 아이치현 고교 교사 25명과 광주의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에게는 1987년 이후 100번째 한국 방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묻힐 뻔했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소녀들의 억울한 죽음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1944~45년 13~15살 조선인 소녀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강재 등 일본 군수공장으로 동원돼 임금도 받지 못한 채 일했다. 전라도(138명)와 충청도(150명) 지역에 피해자들이 많았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 이상갑(49) 변호사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5·18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외국인이라면, 다카하시 대표는 근로정신대 문제를 처음으로 밝힌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도 한국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은 ‘정신대’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어요.”

다카하시 대표는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정신대’라고 하면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를 받는다며 쉽게 증언을 하지 않으려고 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의 노력으로 88년 12월 나고야 옛 공장 빈터에 조선인 소녀 6명 등 대지진 희생자 57명의 이름이 적힌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때 추모식엔 이동련(87·광주시 각화동)씨 등 피해자와 고 최정례씨의 언니 등 유족들이 참석했다. “추모비를 세우니까 일본 전국에 방송이 됐고, 그 덕분에 미쓰비시 기숙사 사감의 손자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그분이 소장하고 있던 60장의 근로정신대 사진을 받아 복사를 했지요.” 이 사진들은 근로정신대 존재의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됐다.

나고야 소송지원회는 1998년 변호사·교수·교사 등 1100여명이 참여해 결성됐다. 이 모임은 근로정신대 피해자 할머니들이 99년 3월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도록 적극 지원했다. 소송은 2008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최종 기각됐다.

하지만 나고야 소송지원회는 2007년 7월부터 미쓰비시 계열사 사장단 회의가 열리는 매주 금요일 나고야에서 도쿄 미쓰비시 본사로 달려가 사죄와 손해배상을 촉구하는 ‘금요행동’을 시작해 382회째 이어가고 있다. 광주에서도 2009년 3월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 결성돼 한일 연대 투쟁을 펼치고 있다. 미쓰비시 계열사인 미쓰비시머티리얼(전 미쓰비시광업)은 2016년 7월 12개 광산에서 강제노역한 중국인 노동자들에게 1명당 10만위안(약 1880만원)씩을 지급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여전히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는 무시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강제연행 문제가 풀릴 것으로 기대가 큽니다.”

다카하시 대표는 “히로시마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2000년 5월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했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피해자 쪽 법률 대리인이 문재인 대통령이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2000년부터 국내 법원에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진행 중인 손해배상 청구 소송 16건 중 3건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그는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점을 들어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나온다면 그 결과를 바탕으로 미쓰비시중공업과 해결을 향한 협의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운명 같아요. 헤겔이 말한 것처럼 모든 필연은 우연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카하시 대표는 “신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계기로 딸과 한국인 사위를 묶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딸은 캐나다 유학 중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그는 “연못에 작은 돌을 던지면 파장이 이는 것처럼 근로정신대 문제를 한일 정부가 합의해 동북아시아 평화 협의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100번째 한국 방문 중 만난 광주의 근로정신대 시민모임 회원들 앞에서 중요한 결심을 공개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한 뒤 유골의 반을 광주 무등산에 뿌려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이번에 일본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광주/글·사진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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