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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중국 역대 상인(商人) 열전’] ➒ 유상(儒商)의 원조 자공(子貢) (1) 막대한 재력 축적해 儒家 형성 기틀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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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79년 어느 날 73세의 공자(孔子)가 깊은 병에 걸렸다. 공자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인 자공(子貢)이 스승을 찾아뵀다.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문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사(賜·자공의 이름)야, 왜 이렇게 늦었느냐”며 한숨을 쉬었다. 늙고 병든 공자는 아들과 같은 제자 자공에 대한 반가움을 그렇게 표시한 것이다(공자와 자공은 31년 차이가 난다). 그리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눈물을 흘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됐으니 아무도 나를 존중하지 않는구나.”

그로부터 7일 뒤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사실상 자공은 공자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유언까지 들은 셈이다.

50대 중반 이후 조국 노나라를 떠나 70세에 이르기까지 15년 가까운 천하주유를 끝내고 돌아온 공자는 후진 양성에 마지막 힘을 다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제자만 72명에, 일반 제자를 합치면 무려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기라성 같은 공자의 제자들 중 임종을 지킨 이는 다름 아닌 자공이었다.

대체 자공은 공자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인연을 갖고 있었을까? 게다가 자공은 덕행과 학문이 깊은 안회와 민자건, 정치에 종사했던 염유와 계로, 문학적 재능에 능한 자유와 자하, 효심으로 이름난 증자 등 다른 수제자와 전혀 다른 사업가, 즉 장사치였다. 그것도 제후국의 최고 통치자와 대등하게 예를 나눌 정도의 엄청난 사업가였다. 여기서 ‘궁궐 뜰을 사이에 두고 대등한 예를 나눈다’는 의미의 ‘분정항례(分庭抗禮)’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을 정도. 사업가의 위상이 한 나라의 임금과 맞먹을 정도를 비유한다. 사업가였던 자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매경이코노미

공자의 수제자이자 당대 최고의 사업가였던 자공의 초상화.


▶자공은 어떤 인물?

▷사업가이자, 훌륭한 외교가

자공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공자의 수제자로 언변에 능했던 사업가, 국제 분쟁에 뛰어들어 5개 국가를 오가며 분쟁을 해결한 외교가, 유가의 후원자 등. 하지만 지금까지 공자에게 있어 자공이 차지하는 비중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록을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공자의 삶은 물론 공자로부터 창시된 유가의 형성에 자공이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사업가 자공의 든든한 자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선 공자의 삶과 초기 유가에 있어서 자공의 비중은 기록에서 확인된다. 공자의 언행록이라 할 수 있는 ‘논어’에 자공은 35회 이상 등장해 비중이 가장 큰 인물로 꼽힌다. 공자 제자들의 전기라 할 수 있는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도 자공의 분량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다. ‘중니제자열전’의 자공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외교가 자공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외교가 내지 유세가로서 자공의 면모는 별도 논의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역대 부자들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화식열전’에도 자공이 등장한다. 기록의 분량이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공자의 삶과 초기 유가에 있어서 자공의 비중과 역할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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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제자들을 나타낸 그림으로 맨 오른쪽이 자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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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가로서의 자공

▷겸손하면서도 시장 예측 밝아

스승 공자는 자공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자공이 수업을 받고 난 뒤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너는 그릇이다”라고 하자 자공은 내친김에 “어떤 그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호련이다”라고 했다. ‘호련’은 종묘 제사에 쓰는 없어서는 안 될 그릇이다. 스승 공자는 제자 자공을 종묘 제사에 꼭 필요한 그릇과 같은 존재로 봤다.

‘논어’를 꼼꼼히 읽어보면 사업가 자공의 인품을 나타내는 대목이 눈에 띈다. 먼저 스승과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을 보자.

자공이 “군자도 미워하는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미워한다. 남의 나쁜 점을 들어 말하는 자를 미워하며,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자를 미워하며, 용감할 뿐 도리에 막힌 자를 미워한다.”

공자가 “사야,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남의 생각을 훔쳐서 자기 지혜로 삼는 자를 미워하며(오교이위지자·惡稱以爲知者), 불손하면서 그것을 용기라고 하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춰내며 스스로 정직하다고 하는 자를 미워합니다”라고 했다.

사업가로서 자공은 기본적으로 겸손하면서도 상대의 비밀을 지켜주고자 했다. 특히 남의 생각을 훔쳐서 자기 것처럼 여기는 자를 미워한다고 한 대목은 오늘날의 저작권 존중을 떠올리게 한다.

자공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애를 썼고 잘못을 범하면 과감하게 고칠 줄 아는 인품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잘못을 범하면 모두가 다 본다. 고치면 모두가 우러러본다.”

억만금을 가진 부호로서 자공은 “가난하면서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처신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를 위해 공부를 통해 자신을 수양했는데 이런 자공의 인문학적 소양에 대해 공자는 “이제 너와 더불어 시(詩)를 논할 수 있겠구나! 지난 일을 들려줬더니 다가올 일까지 알아채니”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업가로서 자공의 사업 수완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앞서 공자가 자공과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겠다며 ‘지난 일을 들려줬더니 다가올 일까지 알아채니’라는 대목과 “회(안회)는 이상을 추구하다 보니 늘 가난하다. 사(자공)는 관청의 청탁이 없는데도 재물을 불렸는데 예측이 잘 맞다”고 한 대목을 통해 그가 시장 변화를 잘 헤아렸음을 알 수 있다. 자공이 사두마차를 타고 비단 등의 선물을 갖고 제후들을 방문하면 가는 곳마다 뜰 양쪽으로 내려서서 자공과 대등하게 답례하지 않은 제후들은 없었다. 어찌 보면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두루 알려지게 된 것도 자공이 그를 앞뒤로 모시고 도왔기 때문이란 해석도 있다. 자공의 재력이 제후들의 허리를 굽히게 만들었고, 또 그 재력을 바탕으로 스승과 제후의 만남을 주선했기 때문에 공자의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게 됐다는 논리다.

자공은 뛰어난 외교관이자, 사업가였다. 시세를 잘 예측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며 재력을 이용해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천하를 누비고 다녔다. 그의 외교 덕분에 노나라는 위기에서 벗어났고, 어떤 나라는 망했다. 국제 정세에 균열이 가게 할 정도로 영향력을 가졌던 사업가였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장점을 칭찬하고 도울 줄 알았으며, 남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자를 미워하는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장사꾼이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외치는 스승 공자를 진정으로 존경하며 스승을 위해 자신의 부를 기꺼이 투자했다. 그 결과 공자는 천하에 이름을 알리게 됐고 자공은 다시 스승의 명성을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는 데 적절하게 이용했다.

특히 사업가로서 자공의 진면목은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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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장]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20호 (2017.08.09~08.1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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