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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반격? "진상 고객님, 전화 먼저 끊을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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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끊을 권리' 확산

콜센터 직원 85% 말폭력 경험

"욕설,폭언 땐 2회 경고 후 끊기"

기업,지자체 강경 대응 나서자

막말 전화 60% 줄어들기도

“야 이 XXX야. 너, 내가 직접 찾아가서 본때 한번 보여줄까?”

10일 오후 온라인쇼핑몰 위메프 콜센터에 근무하는 여성 상담원 정모(29)씨는 한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 고객은 자신이 ‘선착순 특가 이벤트에서 탈락했다’며 다짜고짜 욕설부터 쏟아냈다. 폭언과 욕설은 30분간 이어졌다. 두 달 전만 해도 정씨는 “도와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며 욕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날은 “고객님, 지속적으로 욕설하시면 통화가 종료될 수 있습니다”라고 두 번 경고한 뒤에 먼저 전화를 끊었다. 위메프가 지난달 31일 ‘고객의 성희롱·폭언·욕설 전화는 2회 경고 뒤에도 계속되면 상담사가 먼저 전화를 끊어도 좋다’는 매뉴얼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콜센터에 ‘전화 끊을 권리’가 확산되고 있다. 이른바 ‘감정 노동자’로 불리는 콜센터 직원들을 위해 인터넷쇼핑몰 업체, 대형마트, 홈쇼핑업체, 신용카드사들이 악성 고객 대응 상담 매뉴얼에 ‘먼저 전화를 끊을 권리’를 도입하고 있다. 정신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언어폭력으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하고 악성(惡性) 민원 전화에 업무 시간을 과도하게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폭언 고객 전화는 먼저 끊어도 무방”

이마트는 지난 3월 ‘폭언과 욕설 고객 상담 거부’ 내용을 담은 매뉴얼을 도입했다. 현대카드도 작년부터 폭언·욕설·성희롱을 일삼는 이른바 ‘진상’ 고객의 전화는 상담사가 경고 후 먼저 끊도록 했다.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은 자신의 트위터에 “직원들을 지키는 것도 서비스”라고 밝히기도 했다. 경기 고양시, 경남 창원시 같은 지방자치단체 민원센터에서도 지난 4~5월 ‘악성 민원 대응 매뉴얼’에 따라 언어폭력을 일삼는 민원인에 대해선 먼저 전화를 끊기로 했다. 콜센터 외주 전문업체인 유베이스의 박원래 실장은 “최근 기업·지자체들이 잇따라 폭언·욕설 고객 강경 대응 매뉴얼을 내놓고 있다”며 “최일선에서 고객들을 만나는 상담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했다. 막말 전화 끊기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 현대카드의 경우 작년 상반기 막말 전화가 월평균 300여 건 왔지만, 올해 들어선 월평균 120건으로 60%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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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들 화난 것은 이해하지만 욕설 듣고 있기 너무 힘들어요”

일선 상담사들은 “화난 고객을 달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직업이지만 참을 수 없는 수준의 욕설이 난무한다”고 호소한다. 위메프 상담원 이보섭(35)씨는 “하루 100건의 상담 전화 중 4분의 1 정도는 욕설을 동반한다”며 “그중 정말 참을 수 없는 언어폭력이 하루 1~2건은 있다”고 했다. ‘당신 낳고 엄마가 미역국은 먹었냐’, ‘영원히 사라지고 싶으냐’ 등 인격 모독과 협박성 발언도 적지 않다고 했다.

잡코리아알바몬이 지난해 7월 콜센터 근무자 11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85%가 ‘고객 언어폭력을 경험했다’고 했다. 또 언어폭력 경험자 중 74.0%가 ‘참고 넘긴다’고 응답했다. 콜센터 직원들은 “전화 먼저 끊기는 우리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어장치”라고 했다. 한 홈쇼핑 콜센터에 근무하는 김모(27)씨는 “폭언에 시달리면 회사가 조퇴나 임시 보직 변경을 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괴감은 치유되지 않는다”고 했다.

◇고객 불편 없는지도 되돌아봐야

기업들에서 고객들이 상담사를 정중하게 대하도록 감성에 호소하는 캠페인도 시작됐다. GS칼텍스는 지난달부터 사회공헌 캠페인 ‘마음이음 연결음’을 시작하고, 각 기업 콜센터에 특별 제작한 통화 연결음을 제공하고 있다. 직원과 통화가 연결되기 전, “제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우리 엄마가 상담 드릴 예정입니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나온다. GS칼텍스 관계자는 “고객들의 폭언 빈도가 줄어 상담원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절반 이상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객의 화를 유발하는 상담센터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인터넷 고장으로 통신업체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많은 ARS(자동응답시스템) 질문을 헤쳐나가느라 상담사 연결까지 5분이 걸렸고 어렵사리 연결된 상담사는 자신 업무가 아니라며 다른 부서로 전화를 돌렸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상담사에게 짜증 섞인 말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지난해 현대카드와 함께 ‘막말 고객 전화 끊기’ 실험을 했던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실험 결과 고객들도 ‘내 폭언이 잘못됐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며 “기업들도 불편한 ARS 연결 과정이나 상담사의 대응 방식에 문제가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임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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