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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미술동맹에서 들린 문학수 목소리에 ‘살았구나’ 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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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길을 찾아서】 (28) 6·25전쟁 발발과 의용군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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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는 1950년 6월28일 북한 인민군이 서울 도심에 진입하고서야 전쟁을 실감했다. 뒤늦게 지인의 집에 은신하던 그는 좌익들이 재건한 조선미술동맹 사무실에 불려 나갔다가 북에서 내려온 ‘절친’ 문학수와 재회했다. 미술동맹 사무실은 1921 일본인이 충무로에 열었던 옛 조지야(정자옥)백화점 건물의 창고에 있었다. 사진은 지금도 일본에서 영업중인 ‘정자옥 양복점’의 사사에 실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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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때 경성 5대 백화점의 하나로 꼽혔던 조지야백화점은 1939년 명동 입구로 건물을 신축(사진)해 옮겼고 해방 뒤 한국인이 인수한 중앙백화점을 거쳐 미도파백화점, 이어 지금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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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을 파도처럼 넘어왔다. 북한군의 남침위협 상황이었고, 또 대규모 병력이 38선에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도, 국군은 오히려 비상경계를 풀고 절반가량의 병사들에게 주말 외출을 허락했다. 무방비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은 국무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확약하고, 오히려 4일 이내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였다. 서울에 북한 폭격기가 날고 이어 탱크가 몰려오자 시민들은 ‘전쟁’ 사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민을 버리고 한강 이남으로 몰래 도망간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짜 방송’을 계속 내보냈다. 거기다 국군은 28일 새벽 예고도 없이 한강대교(인도교)와 철교를 폭파시켜 버렸다. 수백명이 수장당하는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꼼짝없이 서울시민은 인민군 치하로 빠져들어 갔다. ‘전쟁’은 그렇게 왔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약 200만명의 사상자, 1천만명의 이산가족, 그리고 무엇보다 잔혹한 동족상잔의 아픈 상처와 분단 상황의 고착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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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발발 직후 피난길에 나선 서울시민들이 국군에 의해 폭파된 한강 다리에 막혀 강변에 몰려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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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국방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받았다. 그의 나이 불과 33살쯤이었다. 그는 110㎏의 거구였지만 전쟁 상황에서 장군 노릇은커녕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채병덕은 북한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데도 염려할 것 없다며 허위보고했다. 한강다리를 폭파하고도 문제없다고 했다. 하지만 무고한 인명 피해를 속출시켰다. 그 피해자 가운데 김병기의 장인(김동원 국회부의장)도 있었다. 채병덕은 김동원을 방문해서도 별일 없다고 안심시켰다. 그래서 김동원은 채병덕의 말만 믿고 서울시내에 피신해 있다 체포되어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흥미롭게도 채병덕 역시 김병기, 이중섭과 평양종로보통학교 동기동창이다. 김병기·이중섭·이휘창은 3조 같은 반이었고, 채병덕은 2조의 반장이었다. 훗날 박정희를 직속 부하로 발탁해준 ‘은인’ 이용문 장군은 1조였다. 모두 용띠 동갑내기다. 채병덕은 어려서부터 ‘일본 지향’이었고, 그래서 일본인 자녀들만 다니던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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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다리 폭파 책임을 둘러쓴 채 1950년 9월 사형당한 공병감 최창식 중령은 68년 재심에서 오명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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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8일 새벽 한강다리 폭파
이승만은 ‘가짜방송’ 흘리며 이미 도망
총참모장 채병덕 ‘허위보고’로 피해속출
‘장인’ 김동원도 믿고 남아았다 ‘희생’

‘거구’ 채병덕도 평양종로보통학교 동기
박정희 발탁한 ‘은인’ 이용문 장군도 동창


평양 제자 김병관 은신처 찾아와 전갈
“죽이지 않을테니 미술동맹 나오시래요”
옛 조지아백화점 ‘동맹’ 위원장은 정현웅
50년미술협회 좌우 회원들 거의 모여


‘실세’ 김진항 지시로 ‘의용군 후보’ 징발
집결지 일신소학교에서 황순원도 만나
평양 출신 장교들 배려로 탈출해 ‘피신’


-6·25전쟁을 어떻게 맞게 되었는가.

“6월28일 남대문에 인민군 탱크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아버지(김찬영)의 지인 집으로 몸부터 숨겼다. 피신하고 보니 여수순천 사건 때 일가족 몰살이 떠올라 하루 만에 후암동 집으로 갔다. 그런데 10살 된 맏딸(김주은·미국 필라델피아 거주)이 집 앞에서 ‘아버지를 잡으러 왔으니 도망가라’고 막았다. 죽을 각오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7~8명의 좌익 청년들이 와 있었다. 그다음 날에도 좌익 자위대가 집을 습격했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방마다 뒤졌다. 아버지의 컬렉션인 오동나무 옷장이 4개 있었는데 그 속에서 비단이 나오자 ‘인민의 피’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북에서 공산당을 겪었던 나는 떨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떤 무리에도 ‘얼굴 하얀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 중 비교적 지성적인 인상의 남자가 내게 물었다. ‘동무, 뭐 했소?’ ‘학교 선생이오.’ ‘무슨 선생이오?’ ‘미술 선생이오.’ 좌든 우든 미술가는 가난한 줄 안다. 그가 상관에게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높은 사람은 내게 ‘꼼짝 말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고는 돌아갔다.

그다음 날 북한군 장교가 다발총을 든 부하를 데리고 집에 왔다. 장교는 그나마 예의를 차려 물었다. ‘신발 벗지 않아도 좋습니까?’ 장화처럼 목이 긴 군화를 벗으라고 할 수 없어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장교는 우선 아이와 어른들을 구별해 놓았다. 그 순간부터 내 다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장교는 ‘미술 선생이라니 작품 좀 봅시다’ 했다. 우리는 2층 화실로 올라갔다. 마침 그때 50년미술협회전 출품작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약간 반추상적인 작품이었다. 장교는 ‘북조선 사람은 무식해서 미술을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내다 도망 온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장교는 물었다. ‘김동원 부의장, 어디 있소?’ 이에 나는 용기를 내, ‘김동원이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대답했다. 장교는 다시 물었다. ‘동무, 반동 안 했소?’ ‘반동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미술동맹에 가서 알아보시오, 내가 반동했는지 아닌지.’ 나는 화실 벽에 붙여놓은 50년미술협회 전시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15명 위원 명단 가운데 이들은 미술동맹의 간부들이고, 이것은 내 이름이오.’ 장교는 ‘다시 올 테니 그대로 집에 있으라’ 명령하고 나갔다. 그 순간 2층 장롱 뒤의 비밀공간에는 장모와 장애가 있던 맏처남, 둘째 처남 부인 등 5명이 숨어 있었다. 발각됐다면 즉결 총살됐을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전쟁은 우리 가족에게도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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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때 재건한 조선미술동맹의 위원장은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기장이었던 정현웅이었다. 하지만 실세는 서울 미대 재학중이던 김진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양 친구의 동생이자 내 제자인 김병관이 미술동맹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죽이지 않을 테니 나오시래요.’ 나는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의 신분을 버리고, 즉 백기 투항의 심정으로, 미술동맹 사무실로 갔다. 사실 배급이라도 받으려면 동맹의 신분증이 필요했다. 그때 미술동맹 사무실은 충무로 옛 조지야(丁子屋)백화점 건물에 있었다. 사무실에 나가보니 미술인들이 다 모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김환기, 손재형, 배렴, 장우성, 박영선 등. 그리고 좌익으로 이쾌대, 김만형, 최재덕 등이 있었다. 이쾌대는 내가 50년미술협회를 조직하면서 그를 중심으로 세웠기 때문인지, 측은한 눈빛으로 보았다. 하지만 위원장 정현웅은 냉정한 눈초리로 쏘아보는 듯했다. 세번째쯤 나간 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경도 사투리로 ‘남반부 동포들이…’, 바로 문학수였다. 그는 인민군의 미술계 대표로 서울에 왔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문학수는 날 죽일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월남하기 전 평양에서 문학수는 내게 ‘공산당이 죽을 쓰고 있는데 우리 들어가 도와줘야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 제안을 뿌리치고 떠나왔고, 우리는 3년 만에 서울에서 재회를 한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수는 ‘반동분자’를 우정으로 대해주었고, 나를 반갑게 껴안았다. 문학수는 나를 살려줄 보호자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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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의 ‘평양 절친’ 문학수는 6·25 때 북한 공산당의 미술분야 책임자로 서울 미술동맹 사무실에 등장했다.


며칠 뒤였나, 청파동 일대가 폭격으로 불바다로 변하더니 그 여파가 후암동 쪽으로 번져왔다. 나는 이때다 싶어 피난길을 재촉했다. 우선 자전거에 쌀 한자루를 싣고, 가족들과 함께 대문을 나섰다. 아무래도 전선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아 북쪽 길을 선택했다. 저녁 무렵 명륜동에 이르러 커다란 기와집의 문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김동인이 잡지 <야담>을 발간할 때 실무를 맡았던 진남포 출신의 임경일이었다. 그는 마침 내가 강사로 나가던 숙명여대의 국문과 교수였다. 그는 어서 들어오라면서 환대했다. ‘반동분자’ 집안사람들을 그렇게 환영하는 것은 사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9·28 서울 수복 때까지 그 집 사랑방에서 신세를 졌다.

-미술동맹의 실질적인 서기장 노릇은 김진항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전두환 정권 시절 정보당국이 발표한 ‘운동권의 대부 김근태’ 집안 배경에서 김진항이 셋째 숙부로 등장한다. ‘김진항은 서울대 재학 중 국대안 반대투쟁을 주동, 49년 10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수감중 6·25 때 탈옥, 김일성 초상화를 제작하는 등 극렬한 좌익운동을 벌이다 9·28 수복 때 처 윤경희와 함께 월북했다’(<경향신문> 1985년 10월29일치). 김진항은 어떤 인물인가.

“김진항은 서울미대 재학생으로 미남이고, 리더십이 있었다. 그는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 제자이기도 했는데, 특히 데생 실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쾌대 제자들 가운데 김진항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뒤에 김진항은 스스로 의용군에 갔다 오기도 했다. 그런 김진항이 어느 날 나를 부르더니 의용군으로 나가라고 했다. 내가 집에 가서 얘기하고 오겠다고 하자 처음에 안 된다고 하다 마지못해 허락했다. 하지만 그때 장인이 좌익에 끌려가 생사불명 상태여서 아내는 거의 혼이 나간 상태였다. 남편인 내가 의용군에 끌려가게 됐다고 해도 멍한 표정이었다. 동맹 사무실로 다시 나간 나는 문학수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따졌다. ‘나더러 의용군에 나가라는 것은 동포를 쏘라는 것 아니냐?’ 문학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의용군으로 갔기에 살아남았다. 피신할 기회를 얻었던 것인가. 역사는, 운명은 참으로 묘하다. 문학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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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직후 서울의 인민군 치하에서 김병기는 의용군으로 징발될 뻔했으나 운 좋게 탈출했다. 그때 의용군 후보 집결지였던 퇴계로의 일신국민학교에서 소설가 황순원도 와 있었다. 사진은 1950년대 말 황순원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아무튼 절반은 극우, 절반은 극좌로 선발된 15명이 의용군 집결처로 이동했다. 그중 조우식은 감시원이었다. 우리는 동맹에서 멀지 않은 옛 일신소학교에 집결해서 하룻밤을 보냈다. 거기서 나처럼 의용군 후보로 끌려온 소설가 황순원을 만났다. 내가 ‘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냐?’ 하고 물으니, 황순원은 ‘병기야, 그런 이야기는 나한테만 하는 거야’라고 했다. ‘나도 몰라’라고 친구처럼 말하지 않고, 어른처럼 주의를 줘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다음 날 이동하는 길에 공습경보를 만나기도 했던 일행은 왕십리의 어떤 학교에서 하룻밤을 더 묵었다. 그날 밤 우연히 말을 튼 장교의 배려로 그의 방에서 잤는데, 이튿날 신체검사 시간에 보니 군의관이었다. 그는 나보고, ‘분명히 병이 있을 텐데’라며 석방을 암시했다. 그러더니 ‘불가’라고 판정했다. ‘의용군 불가’ 일행은 수송초등학교에 다시 집결했다. 마침 평양말을 쓰는 장교들이 있어 말을 걸었다. ‘당신들도 평양에서 왔소?’ 장교들은 나를 ‘선생님’이라고 대접해줬다. 그들 중 한 명이 ‘내일 나를 주목하라’고 당부했다. 이튿날 운동장에 모였는데 그가 나를 야단치는 척하면서 정문으로 끌고 갔다. 문 밖에 이르자 그는 나보고 ‘뛰라’고 했다. 결국 나는 ‘적’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명륜동 집 근처 장작더미 속에서 숨어 살았다. 그사이 김환기와 권옥연이 찾아오기도 했으나 아내는 ‘집에 없다’고 잡아뗐다. 김환기는 화를 내면서 돌아가기도 했다.

다만, 문학수에게만은 나의 피신 사실을 알렸다. 단파 라디오를 통해 전황을 듣고 있던 나는 어느 날 문학수에게 서울에 곧 유엔군이 들어올 것 같으니 피신하라고 전했다. 정말 그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며 슬그머니 사라졌다. 마침내 9·28 수복이 되자 나는 유엔군의 뒤를 따라 ‘고향’ 평양으로 갔다. 그 길에 우연히 문학수의 가족을 만났는데 문학수가 사라졌다며 걱정에 울기만 했다. 나는 그의 가족을 위로해주었다. 전세(戰勢)의 역전은 친구 사이의 처지도 바뀌게 했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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