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4 (금)

[한지훈의 스테레오마인드] 까뮈씨, 눈을 떠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머니투데이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다보니 같이 살고 있는 강아지들이 자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당연히 강아지가 재롱을 부리면 귀엽고, 강아지가 말을 안 듣고 고집을 피우면 화가 나고, 강아지가 다치기라도 하면 마치 내가 다친 것처럼 아프고. 물론 이 녀석들이 사고라도 치면 그 뒤처리 역시 내가 해야 하고. 사고라고 해봤자 뭐 별건 아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반갑다고 덤벼드는데 그 발톱에 옷이 구멍이 나고, 시골에서 산책하다 고라니라도 발견하면 빛의 속도로 달려가 고라니를 물어 죽이고, 아버지 몰래 부엌이라도 털기 시작하면 TV에 가끔 등장하는 저장 강박 장애 환자의 집처럼 온 집안을 쓰레기 더미로 만들어 놓고, 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외출하면 귀가 후 청소하는 데에 두어 시간이 걸린다는 것, 뭐 그 정도이다.

이런 건 30kg의 삽살개 두 녀석을 키우는 세금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키우면 된다. “내 자식은 왜 그렇게 아버지 마음을 몰라주고 사고만 치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자 쌓이는 건 스트레스와 몸속에 사리뿐이니까.

그러던 중 가슴이 철렁한 일이 있었다. 하루 종일 통행하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나 될까 말까 한 시골의 산에서 강아지들과 산책을 하는데 갑자기 이 녀석들이 산책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뛰기 시작하는 거다. 고라니라도 봤나보다. 이 녀석들이 어릴 때에는 무작정 뛰다 길을 잃을까 걱정되어 같이 산 속을 뛰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니 그냥 “얘들아, 간식먹자. 간식.” 한 마디면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바람같이 나타난다. 간단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보통 이쯤 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버지, 간식은 언제 주시나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봐야 하는데 한 녀석이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다. 풀에 눈을 쓸리기라도 한 건가? 삽살개라 털이 앞을 가려 그러잖아도 앞을 잘 못 보는 녀석이 그 큰 눈을 제대로 못 뜨니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내 몸에 스크래치 나는 건 참아도 내 강아지들 몸에 스크래치 나는 건 참지 못하는 나다. 내가 이 녀석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집에 가서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풀에 눈을 쓸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나오지 않는다. 하긴 풀에 눈을 쓸려서 다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전화기의 주소록을 연다. “김 박사님?” “지금 원장님 진료중이신데요.” “아, 네. 저는 한지훈이라는 사람입니다. 시간 나실 때 전화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3분 후에 전화기가 울린다. “아이고, 한 선생님.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잘 지내시죠?” “네. 저는 잘 지내는데 우리 집 막내 녀석이 눈을 다쳐서요.” “네? 어쩌다가요? 한 선생님 결혼 하셨습니까?” “산책을 하다가 풀에 눈을 쓸린 것 같아요.” “네? 풀에 눈을 쓸려요?” “김 박사님도 아시잖아요. 우리 집 까뮈요.” 잠시 말이 없다. “아, 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상처가 커서 눈동자에서 피가 나거나 하지 않으면 그냥 인공 눈물 같은 걸로 잘 씻겨주시면 나아질 겁니다.” 이 김 박사님이라는 분은 모 대학병원 안과 과장님이시다. 물론 사람 안과.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눈을 씻어주니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이 녀석이다. 눈을 다쳐서 애틋한 마음에 눈을 작게 뜨고 있을 때마다 간식을 줬더니 이 녀석이 계속 눈을 작게 뜨려고 노력을 하는 거다. 그러니까 아침에 일어날 때(이 녀석들은 밤에 나보다 더 깊이 잔다. 밤에 집을 지키는 개의 이야기는 남의 집 이야기라는 말씀)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기 전까지는 눈을 제대로 뜬다. 자기 누나와 놀 때에도 눈을 제대로 뜬다. 즉 내가 쳐다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눈을 뜨고 내가 쳐다볼 때에만 간식을 얻어먹기 위해 눈을 작게 뜬다는 말씀. 카이저 소제가 따로 없다. 언제까지 이 녀석의 사기 행각에 속는 척을 해줘야할지 모르겠지만 작게 뜬 눈을 볼 때마다 귀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까뮈야. 눈 크게 떠도 아빠가 간식 줄게 이제 눈 크게 뜨자.” 언젠간 알아듣겠지 뭐.

한지훈 도서출판 스테레오마인드 대표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