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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용산 군기지 조성 문건 111년 만에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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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부터 마을 강제철거

주민 내무부 몰려가 집단저항

기지 규모 118만평 대폭 축소

“용산공원 조성사업에 참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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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한국 용산군용 수용지 명세도. 용산구 제공


“(전략)지도처럼 제1호부터 제4호 구역 일자길 내에 묘지와 집 그리고 경작물을 모두 철거 조치하니 통감부에서는 참조하기 바람.”

1906년 6월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 군부의 참모장 오타니 기쿠조는 통감부(조선총독부의 전신)의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공문의 요지는 당시 일본군이 현재 서울 용산구 일대에 군기지를 조성하기 위해 주민들의 가옥과 무덤 등을 강제 철거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토는 당시 일본으로 출장을 떠나있어 이 공문을 받지 못했다. 이에 통감부의 2인자였던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키치는 ‘(공문내용처럼)집 묘지 경작물을 철거할 경우에 주민들에게 상당한 고통을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인의견을 공문에 첨부해 일본에 있던 이토에게 보냈다.

용산구는 이 같은 공문 등이 담긴 일제시대 용산 군기지 조성 관련 문건을 13일 공개했다. 111년만에 공개된 이번 문건은 군부와 통감부 사이에 오간 공문뿐 아니라 일제가 용산 군용지를 수용하면서 조사한 가옥, 묘지, 전답 등 구체적인 숫자와 당시 도성 바깥의 옛 길, 지도 등도 담고 있다. 특히 문건 말미에 약 300만평에 이르는 용산군용지 면적과 경계선이 표시된 ‘한국용산군용수용지명세도(韓國 山軍用收容地明細圖)’가 9쪽에 걸쳐 실려 있어 일제강점기 전후 용산일대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건에 포함된 명세도(상세지도)에는 대촌, 단내촌, 정자동, 신촌 등 옛 둔지미 한인마을의 정확한 위치와 마을 규모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둔지미 마을은 조선 후기 둔지방(‘방’은 현재의 구 단위)의 일부였던 곳이다. 당시 용산은 후암동ㆍ이태원ㆍ서빙고동 일대인 둔지방과 원효로 일대 용산방( 山坊ㆍ현재 행정구역 기준 마포구 일대)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문건과 지도 등에 따르면 당시 둔지미 한인마을에는 가옥 1만4,111칸, 분묘 12만9,469총, 전답 10만7,482평이 분포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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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한국 용산 군용수용지 명세도 현재 주요 지점 표시. 용산구 제공


명세도 한편에 기록된 ‘구역별 철거기한’에 따르면 일제는 1906년 6월부터 1907년 4월까지 둔지미 마을에 대한 강제철거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과 각종 사료를 종합해보면, 당시 둔지미 마을 사람들은 일제의 강제철거에 집단적으로 저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8월 황성신문 등에는 1905년부터 1908년 용산기지가 완공될 때까지 일제가 가옥과 토지 값을 지급하지 않자 주민들이 대한제국 내부(내무부)에 몰려가 호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같은 주민들의 집단저항 때문에 일제는 애초 약 300만평으로 추진했던 군용기지 규모를 약 118만평으로 축소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후 해당 지역에는 일본군사령관 관저가 들어섰으며 오늘날 인근에는 미8군 드래곤힐 호텔(DHL)이 자리해 있다.

이번 문건은 용산문화원에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김천수(41) 씨가 ‘아시아역사 자료센터’에서 수십만 건의 문서를 조회한 끝에 찾아냈다.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가 공개로 설정해둔 문건이었다. 김씨는 “이번 문건을 통해 용산일대는 기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으며 한이 담긴 장소라는 사실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국가 주도로 진행되는 용산공원 조성사업에 역사적 배경과 구민들의 목소리를 담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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