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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정민의 世說新語] [423] 구겸패합 (鉤鉗 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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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이첨(李爾瞻)이 함경감사로 부임하던 날, 수레를 타고 만세교(萬歲橋)를 건넜다. 그는 서안(書案)에 놓인 책만 보며 바깥 풍경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감영의 기생들이 그의 잘생긴 얼굴과 단정한 거동을 보고는 신선 같다며 난리가 났다.

늙은 기생 하나가 말했다. "내가 사람을 많이 겪어 보았는데, 사람의 정리란 거기서 거기다. 이곳 만세교는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기이한 볼거리다. 누구든 처음 보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쳐다보지도 않는다면 사람의 정리가 아니다. 그는 성인이 아니면 소인일 것이다."

이이첨은 인물이 관옥(冠玉)처럼 훤했다. 대화할 때 시선이 상대의 얼굴 위로 올라오는 법이 없었고, 말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처럼 웅얼거렸다(視不上於面, 言若不出口). 그를 본 이항복이 말했다. "한 세상을 그르치고, 나라를 망치고 집안에 재앙을 가져올 자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 뒤에 그대로 되었다. '송천필담(松泉筆談)'에 나오는 얘기다.

명나라 왕달(王達)은 '필주(筆疇)'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할 듯 말하지 않으면서 남을 해칠 기미를 감추고, 웃는 듯 웃지 않으면서 쥐었다 놓았다 하는 뜻을 머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간사한 사람이다(其有欲言不言, 而藏鉤鉗之機, 欲笑不笑, 而含捭闔之意, 此必奸人也)."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입을 열지 않고, 웃으려다가 문득 웃음기를 거둔다. 머릿속에 궁리가 많기 때문이다. 구겸(鉤鉗)은 갈고리나 집게처럼 박힌 물건을 뽑아내는 도구다. 패합(捭闔)은 열고 닫는 것이니, 상대를 쥐었다 놓았다 하며 가지고 논다는 의미다.

이런 말도 했다. "험한 사람 앞에서는 남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 간사한 사람 앞에서는 남의 속임수를 논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한때 말하고, 저도 한때 들었다. 말한 사람은 굳이 저를 비난하려 한 것이 아닌데, 듣는 사람은 마음에 쌓아두고 잊지 않는다. 험한 사람은 그 사사로운 이야기를 폭로와 비방의 거리로 삼고, 간사한 자는 그 기교(機巧)를 써서 이익의 바탕을 만든다." 갈고리와 집게의 수단을 감추고 마음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속임수가 온통 난무하는 세상이다.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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