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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탈원전 공론화 4大쟁점 ① 전문가 제치고 시민이 에너지대계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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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 폐기의 정치학 ◆

매일경제

28일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3·4호기(왼쪽) 옆쪽으로 전날 정부의 건설 중단 결정으로 멈춰선 신고리원전 5·6호기 건설 현장이 보인다. 정부의 일방적인 백지화 결정에 따라 지역주민들의 반발은 물론 막대한 경제적 손실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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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신고리원전 5·6호기 공사 중단' 실행 여부를 공론화 과정을 통해 풀어 나가겠다고 밝혔지만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 27일 정부가 발표한 '공론화 추진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우선 이해관계자와 에너지 분야 관계자가 아닌 사람 중 국민적 신뢰가 높은 덕망 있고 중립적인 인사 10인 이내로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이다. 위원회는 공론조사 방식에 대한 일체의 기준과 내용을 정하고, 일정 규모의 시민배심원단을 선정해 '공론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기간은 3개월 이내가 원칙이다. 아직은 중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해 시민배심원단에 '공론'을 묻는다는 얼개만 있을 뿐 모든 게 백지 상태인 셈이다.

업계와 시민사회에서는 '전문가를 배제하고 시민 의견만으로 원전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한 논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9년 기본계획 수립 후 2014년 실시계획 승인, 2016년 원자력안전위원회 의결 등 전문가 심사를 거쳐 승인된 공사를 여론에 따라 뒤집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1일 '탈원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며 재고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원자력·에너지 학계 전문가 230여 명이 반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원자력 학계 교수들 중에는 탈원전을 선언한 대통령의 연설문 중에도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며 '정부 자문위원들이 환경운동가들로만 구성돼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원전 폐지와 같은 전문적 의사결정에서 전문가가 전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원전 폐지' 틀을 대선 과정부터 짜놓은 정부가 과연 중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정부는 중립성 원칙하에 남녀 비율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1~2명은 20·30대로 선임해 10명 이내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에너지 분야 관계자들은 이해관계자라는 이유로 빠질 것이 요구됐지만 환경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민들이 다수 배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전 찬반'에 대한 논쟁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공론조사 기준과 방식 일체를 정할 위원회 구성에서부터 '중립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게 되면 전체 공론화 과정의 정당성이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배심원단 선정도 마찬가지다. 국무조정실은 독일을 예를 들어 불특정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겸 여론조사를 먼저 실시하고, 이 중 일정 규모의 시민배심원을 선정해 최종 의사결정을 맡기는 숙의형 여론조사 방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시민배심원들에게 사전에 충분한 정보와 토론 기회를 제공하고 이해당사자와 배심원이 함께 참가하는 TV토론회 등을 통해 배심원단이 최종 결정을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설문조사와 여론조사 인원 일부 중 누구를 배심원으로 선정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중의 신중한 설계가 요구된다. 당장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국내 정당선거에서 시민공천 배심원단 선정 방식을 둘러싼 절차적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만 봐도 쉽지 않은 과제다. 위원회는 '공정성, 중립성, 객관성, 책임성' 등 배심원단이 지켜야 할 원칙을 사전에 설정하기로 돼 있는데 기준을 충족시키는 배심원단, 특히 국민 여론이 납득할 수 있는 배심원단을 선정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 같은 부작용을 우려해 독일식이 아닌 국민 여론조사 방식을 택할 경우에는 국회를 우회해 여론에 따라 정치를 하는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

마지막으로 3개월이라는 한시적 기간을 두고 의사결정을 밀어붙이는 방식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반발이 클 것으로 보인다. 숙의형 여론조사 모델이 한국에서 이런 초대형 의제에 적용된 적이 없고 독일·일본에서도 배심원단의 토론에만 1개월 넘는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공정률이 28.8%에 이른 신고리원전 5·6호기 공사를 잠정 중단하는 대신 공사 중단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론화 작업을 최대한 신속히 3개월 안에 마친다고 못 박았다. 현장 혼란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이지만 거꾸로 '졸속 추진'으로 인한 후속 논란이 커질 우려도 크다. 영국 독일 스웨덴 등 해외에서 10~30년씩 장기간 논의를 거쳐 결정된 원전 정책 전환을 3개월 만에 결정하는 과정에서 국민과 공감대 형성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한다면 결정 후에도 논란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석민수 기자 / 이승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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