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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권대열 칼럼] 2003년 文 수석이 2017년 文 대통령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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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대통령, 오늘 美 출국… 트럼프는 '同盟' 확인할 것

2005년 동북아 균형자론처럼 美·中 사이에 서는 건 위험

"한·미 동맹이라는 현실적 이해… 진보도 그런 판단할 수 있어야"

조선일보

권대열 정치부장


문재인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오늘 출국한다. 동맹(同盟)이 진보 정부에서도 단단히 유지될 것인가가 포인트다. 어쩔 수 없이 노무현 정부 때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2005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에서 취임 2주년 연설을 했다. 한·미 동맹 금가는 소리가 들릴 때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한·미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돼 있다"면서 "우리 군대는 동북아시아 균형자로서 지역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처음 나오던 순간이다. 며칠 뒤인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다시 "우리 군은 동북아 균형자"라고 말했다. 외교가(外交街)가 '싸'해졌다. 외교 담당 기자였던 필자는 김경원(작고) 전 주미 대사에게 어떤 파문이 일지 물었다. 그는 "한국이 균형자가 되려면 19세기 영국처럼 어느 한 편을 들었을 때 그쪽으로 힘이 기울어야 한다. 우리가 미·일과 중·러 사이에서 한쪽 편을 든다고 힘이 기울겠느냐"며 "국제사회는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벗어나려 한다는 말로 읽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그대로 흘러갔다. 5월에는 미 국방부에서 "동북아 균형자론과 한·미 동맹은 배치된다"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왔다. 노무현 정부는 "한·미 동맹은 변함없다" "일본을 향해 한 말이지 미국은 관계없다"는 등으로 진화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그 해 6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균형자란 용어는 적절치 않다"며 접었다. 당시 정부는 이 문제가 동맹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그랬을까. 그때 미국을 직접 상대했던 전직 고위 당국자 얘기는 다르다. "미군 기지 이전, 작계 5029, 미 대사관 부지 문제 등 각종 동맹 이슈가 이어질 때였다. 그런데 딱히 어느 순간 갑자기 나빠진 건 아니었으나 점점 미국은 멀어졌다"며 "아무리 균형자론을 해명해도 정권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의 속 생각은 나중에 드러났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2011년 자서전에서 '(노 대통령은) 나에게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균형자로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의를 하는 등 반미(反美)적 모습으로 보이는 발언을 종종 했다'며 '이해하기 어려운(hard to read) 사람이었다'고 했다. 우리 대통령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은 거슬리지만, 미국이 '미·중 사이 균형자'란 말을 '반미'의 근사치(近似値)로 본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지구 어디선가는 전쟁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 동맹이란 함께 적과 싸우는 나라란 의미다. 동맹의 기원부터 그렇다. 그리스 스파르타는 동맹을 맺으면서 간단하게 요구했다. "같은 적(敵)과 같은 친구를 가질 것."(크세노폰 '그리스 역사')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하영선 서울대 명예교수는 한·미 동맹 관련 보고서에서 '同은 신에게 올리는 축사를 담는 통을 의미하는 口자와 대나무 형태의 술잔 문형이 어우러진 글자다. 盟은 달빛이 비치는 모양인 明(밝을 명)자와 血(피 혈)자로 구성된다.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밤 피로써 맺는 언약, 즉 신에 대한 맹세'라고 설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 취임 직후 통화에서 "한·미는 단순히 좋은 동맹이 아니라 '위대한 동맹'(great ally)"이라고 했다. 이 말은 '그러니 뭐든 이해한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그에 맞게 움직여 달라'는 뜻이다. 문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은 "동맹은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요한 요구는 할 수 있다"고 말해 왔다. 당연하다. 다만 미국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 군인들 보호하게 방어 미사일 한 세트 좀 갖다 놓겠다"는데 중국이 뭐라고 하니까 좀 기다려라? 트럼프 성격상 '동맹'을 말하면서 한 편으로 미·중 사이에 선 것처럼 말하면 '이해하기 힘든 사람'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이 목표하는 '우의와 신뢰를 쌓기 위한 정상회담'은 물 건너가는 것이다.

지지층 반발과 그동안 했던 말들이 신경 쓰일 수 있다. 그래도 해야 할 일과 말은 해야 한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때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 했던 고민에서 답을 찾았으면 한다. '이라크 전쟁은 정의롭지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와 한·미 동맹이라는 현실적인 이해 때문에 파병했다. 그것이 국가 경영이다. 진보·개혁 진영이 그런 판단도 할 수 있어야 한다.'(문재인 '운명') 아쉽게도 우리의 힘과 위치는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권대열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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