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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이훈범의 시시각각] 찌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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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로 무장한 대중 앞에

백마 탄 초인은 나타날 수 없다

겸손한 인사가 가장 강력한 무기

중앙일보

이훈범 논설위원


‘영웅의 시대’는 끝났다. 백마 탄 초인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제아무리 처칠이라도 이 시대를 살았다면 ‘보수 꼴통’ 늙은이 취급밖에 못 받았을 테고, 링컨이 다시 살아온대도 정치 라이벌을 기용하는 ‘허세’는 꿈도 못 꿨을 터다. 간디 같은 성인일지라도 ‘아힘사(불살생·비폭력)’를 외치기도 전에 총탄부터 맞았을 것이다.

영웅 탄생이 불가능한 이유는 대중이 강력한 무기를 소유한 까닭이다. 다름 아닌 스마트폰이다. 소셜네트워크로 연결된 대중은 그야말로 ‘언터처블’이다. ‘칼’을 이긴 ‘펜’이지만 결코 ‘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만약 홉스가 이 시대 학자였다면 ‘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국가가 아닌 대중에게 붙여졌지 않을까 싶다.

대중 앞에 나서려는 사람은 먼저 대중의 SNS 세례를 이겨 내야 한다. 그것은 늘 혹독하고 자주 사악하며 간혹 억지스럽다. 정확한 ‘팩트’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다. 대중의 ‘털기’는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되고, 필요에 따라 가감된다(반기문 퇴주잔 동영상이 좋은 사례다). 거짓이 사실처럼 포장되는 건 약과고, 악의적인 ‘거짓 사실’이 생산되기도 한다(문재인 대통령 아들 취업 특혜 증언이 조작이었다).

이렇게 발가벗겨지고 덧칠된 뒤에도 영웅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강점은 해체되고 허물만 엉겨 붙은 ‘찌질이’가 될 뿐이다.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지도자’라는 분에 넘치는 타이틀로 대중 앞에 설 수 있다. 객관식 선택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힘(?)이다. 상처뿐인 영광도 영광인 거다. 바야흐로 ‘찌질이의 시대’다.

이 대목에서 흔히 범하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 ‘분에 넘치는’ 타이틀을 거머쥔 데 도취돼 자신이 찌질하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그 같은 착각의 결과는 지난 정권이 여실히 보여 줬다. 말을 짧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초식으로 위장했지만, 그 찌질함을 감춰 주고 이용하면서 기생한 무리의 보위를 받았지만 끝내 정체를 숨기지 못하고 권좌에서 끌려 내려오고 말았다.

그렇다면 찌질의 시대에 맞는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오히려 극도의 찌질함을 드러내 무기로 삼는 문파도 있다. 지난 대선에서 2등을 한 정치인이 대표적 사례다. 그가 늘 하는 얘기가 “폰은 펜을 이긴다”이다. 같은 전략으로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인물들도 다른 나라엔 있다. 하지만 우리한테도 통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찌질이 세상이래도 우리야 최소한의 범절은 따지는 나라 아닌가.

그보다 높은 수를 시전하는 인물이 우리 대통령 같다. “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얻는다(滿招損謙受益)”는 『상서(尙書)』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한다. 스스로 낮추니 ‘참사’에 가까운 인사 실패에도 흔들림이 크지 않다. 대중은 영웅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소통의 리더를 원할 뿐이다.

하지만 양복을 직접 벗어 걸고 희생자 유족을 안아 주는 감성정치만으론 한계가 있다. 소통이 감정의 교환만은 아닌 까닭이다. 만기친람할 수 있는 영웅이 아니라면 무엇보다 함께 일할 사람을 잘 골라야 한다. 그들 역시 혹독한 SNS 세례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인물을 억지로 살려내 봐야 대중의 조롱만 받을 뿐이다. 불통은 그런 약한 고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공자의 말이 다른 게 아니다. “스스로 올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고, 스스로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해도 따르지 않는다(其身正不令而行 其身不正雖令不從).”

겸손의 미덕이 인사에서 발휘되면 오히려 최고의 무기가 된다. 소신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를 향해 펼칠 때 더욱 강한 것이다. 반대로 인재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아야 더욱 큰 사람을 구할 수 있다. 영웅의 시대가 아니어서 더욱 그렇다.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기자 lee.hoonbe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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