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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기억할 오늘] 보도연맹 학살사건(6월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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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국가 폭력에 희생된 보도연맹원 유골 수습 장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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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保導聯盟)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시민들을 전향시켜 ‘건전한 반공시민’으로 개조하자는 취지로 1949년 6월 5일 창설한 단체다. 반공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린 오제도 선우종원 등이 주도했지만, 훗날의 새마을운동 조직처럼 국가권력이 조직하고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 줄여서 ‘보련’이라고도 했다. 초대 회장은 일제시대 공산주의 운동가였다가 북한에서 내려와 전향한 정백이었고, 간사장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직부장 출신 박우천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앞서 47년 남로당을 불법화했고, 48년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다. 48년 제주 4ㆍ3 항쟁과 10월 여순사건을 거치며 숙군(肅軍)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한 터였다. 이제 사회 내 남로당 등 좌익 잔존세력을 뿌리뽑는 일이 필요했고, 보도연맹은 그들을 골라내는 거대한 그물이자 덫이었다.

연맹(사실상 정부)은 신문과 라디오 삐라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가입을 독려했다. 전국 마을 단위의 통ㆍ반장과 이장은 물론이고, 각 경찰(지)서 순경들까지 동원했다. 관내 좌익 활동 전력자를 대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좌익 전력이 말끔히 사라지고 진짜 국민이 될 수 있다”고 선전했다. 비료와 보리쌀 등을 우선적으로 배급하고 생업에도 이런저런 도움을 준다는 유인책도 뒤따랐다. 말이 선전이지 사실상 강요였다. 마을 단위의 할당량을 무리하게 채우느라 엉뚱한 이들을 가입시키는 일이 허다했고, 심지어 중학생까지 거기에 이름을 올렸다. 그들은 가입서와 함께 활동 내용을 자백한 양심서를 제출해야 했고, 함께 좌익활동을 했던 이들의 명단도 기재해야 했다. 1년 뒤 6ㆍ25 전쟁이 발발할 무렵 연맹원은 무려 33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국가의 약속과 달리 툭하면 불려가 사상 교육을 겸한 수모와 고초를 겪곤 했다.

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고, 이틀 뒤인 27일 새벽 이승만은 서울을 버렸다. 서울 함락 전 경기 북부의 연맹원 일부가 다시 붉은 완장을 차는 일이 있었다. 정권은 후방의 ‘잠재적 빨갱이 소탕’에 나섰다. 국군과 서북청년단 등이 주도한 보도연맹원 학살이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됐다.

그렇게 최소 2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참여정부의 과거사 조사위 활동에도 불구하고 최종 명령권자가 누군지, 희생자가 몇 명인지 등 진상은 충분히 밝혀지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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