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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이호준의 길위의 편지] 작아서 아름다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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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여행은 스스로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하는 수단이다. 여행자들이 전하는 세상 곳곳의 이야기는 흥미와 대리만족을 함께 안겨준다. 이호준 작가가 전하는 여행의 뒷얘기와 깨달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69>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호엔잘츠부르크 성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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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본 잘츠부르크 성채/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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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여행을 왜 가느냐고 물어보면, 관심사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구는 여행이라는 이름 자체가 좋아서, 누구는 그냥 길이 좋아서, 누구는 준비하는 과정이 좋아서 떠난다고 대답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유적이나 오랜 시간을 머금은 건축물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고, 음악이나 영화의 배경을 찾아가기도 하고, 다양한 음식을 맛보기 위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밖에도 낯선 곳에 대한 기대 때문에,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과 만나러… 등 갖가지 대답이 나온다.

누가 내게 여행의 이유를 묻는다면, 여행 자체가 주는 설렘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 삶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얼마나 큰 선물인지.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나는 여행길에서 곧잘 ‘작은 것들’에게 시선을 빼앗긴다. 작은 풀, 작은 꽃, 작은 동물들, 그리고 너무도 평범해서 언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 ‘작은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가슴 깊이 들어와 행복으로 자리 잡고는 한다. 작지만 뿌리 깊은 행복이다.

중부유럽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Salzburg)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 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하루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은 도시 곳곳에는 늘 관광객과 여행자들이 북적거린다. ‘유럽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잘츠부르크는 오랜 기간 예술과 낭만의 중심지였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면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다보니 어딜 가나 음악이 강물처럼 흐른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수준이 무척 높다.

잘츠부르크에 가는 사람들이 반드시 들르는 곳 중 하나가 호엔잘츠부르크 성채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도 등장하는 이 성은 야경으로 유명하며 중부유럽의 성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약 120m 높이에 단단하고 정교하게 쌓은 성채로 1077년에 처음 지은 뒤 여러 차례 보강했다. 바위를 성벽의 기반으로 삼았는데, 얼마나 튼튼한가 하면 1525년에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반란군이 3개월 동안 포위하고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했다고 한다.

굳이 성채까지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보다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 때문이다. 푸니쿨라라는 산악용 궤도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잘츠부르크 시내가 손에 잡힐 듯 한 눈에 들어온다. 잘차흐 강(Salzach River)을 중심으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 펼쳐진 시내 풍경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알프스 산맥의 설산들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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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 성채에 핀 작은 꽃들/사진=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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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에 갔을 때 내 눈길을 가장 먼저 끌어당긴 것은 성벽에 피어있는 작은 꽃들이었다. 도저히 뿌리를 내릴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피어난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딱히 물어볼만한 사람도 없었던 데다, 이름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꽃 이름도 모른 채 빠져들고 말았다. 보라색 꽃들은 우리로 보면 ‘바람꽃’을 닮아있었다. ‘너도’니 ‘나도’니 ‘변산’이니 ‘풍도’니 이름도 많은 그 바람꽃. 노란색 꽃들은 작은 민들레를 닮아있었다. 바위에 깔린 몇 알의 모래 알갱이를, 혹은 시멘트 틈을 단단히 그러쥐고 한 생을 견디는 꽃들은 차라리 경이로웠다.

이들은 하필 이곳에 뿌리를 내렸을까? 이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물은 어디서 길어 올리며 바람에는 어떻게 견딜까? 이런 환경에서 어찌 이렇게 환하게 빛날 수 있을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지만 물음은 한없이 이어졌다. 가녀린 꽃들은 척박한 환경을 원망하는 기색 따위는 없었다. 마치 삶에 지친 내 가슴에 환한 등불 하나 걸어주기 위해서 기다린 것처럼 꿋꿋해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들에게서 우리 주변의 작고 소외된 사람들을 읽었다. 세상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흔히 장삼이사라는 말 속에 혹은 김 씨, 이 씨라는 익명화된 이름 속에 감춰져 있는 사람들. 욕심을 부린 적 없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해본 적 없는 사람들. 낮게 핀 꽃들에게서 낮게 엎드려 사는 민초들의 모습을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가장 낮은 곳에서 핀다’고 혼자 되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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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 시인·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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