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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대중문화 거꾸로 보기] 성장을 돕는 방송 vs 환상을 키우는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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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얼마 전 길을 지나가다 한 어머님이 필자를 알아보시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어떻게 영어 공부 했어요?"

요즘 들어 자주 듣는 질문인지라 별 고민 없이 바로 대답해 드렸다. "전 TV 보면서 했어요."

어머님은 뻔한 대답에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자리를 떠나셨다. 사실 그 당시에는 조기교육의 열풍이 심하지 않았다. 또한 학업 교육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셨던 어머니 덕분에 초등학교 시절에는 별도의 공부 시간이 필요 없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이 중학교 입학을 위해 방과 후 과외를 하는 시간에는 가야금과 클래식 기타를 배웠고, 주말에는 영어나 수학 학원을 다니는 대신 수영과 승마를 익혔다.

필자가 유일하게 영어를 접하는 시간은 등교 전 아침 식사 시간뿐이었다. 어머니는 아침 식사를 할 때마다 항상 TV를 틀어주셨는데, 늘 영어를 노래로 만들어 들려주는 프로그램이 켜져 있었다. 식사를 하며 무관심하게 듣는 음악이었지만 학교에 등교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흥얼거리는 날이 많았다. 노래로 듣는 영어 단어들은 머릿속에 손쉽게 저장되었고 별도의 공부 없이도 중학교 1학년 교과서 단어를 미리 숙지할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3년 남짓 출연했던 SBS '세계로 싱싱싱'이라는 어린이 영어 프로그램으로 방송 활동 때문에 결석이 잦았던 학교 영어 수업을 만회하곤 했다. 영어를 노래와 콩트로 만들어 알려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통째로 외워야 했던 영어 노래 덕분에 영어 단어나 문장들이 자연스레 공부가 되었고 함께 출연하는 외국인 친구들의 본토 발음을 자주 접할 수 있어 발음교정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예전의 어린이 TV 프로그램들은 방송을 시청하면서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적 목적이 강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한글, 음악, 영어 등 어린이들이 습득해야 하는 분야들을 TV를 통해 배울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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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에는 교육보다 상업적 목적이 강한 프로그램들이 많은 듯하다. 프로그램 시청을 통해서 어린이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익히게 한다기보다는 TV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어 곧장 장난감 가게로 달려가게 하려는 의도가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깔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만화 속에서 어린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캐릭터가 곳곳에 등장하는 프로그램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PPL(Product Placement)이 불가능하며 주 시청층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광고수익도 적어 일반적인 프로그램에 비해 수익 창출에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캐릭터 사업이라는 2차적인 방법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현재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움과 동시에 재미를 주는 프로그램으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캐릭터 또한 어린이들의 집중력과 이해력을 높이는 데 유용한 아이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자들보다 제작자들의 이윤이 우선시되어 생겨난 장르 쏠림 현상은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비록 포켓몬스터 카드나 변신로봇이 없어도 친구와 대화가 가능한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어린이 드라마·어린이 음악 프로그램·어린이 쇼 프로그램 등 예전과 같이 다채로운 어린이 프로그램들이 제작되는 세상은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본다. 어린이들의 동심을 지켜주면서 학습에도 도움이 되는 재미난 어린이 프로그램들이 다시 한번 부활하기를 희망해 본다.

[이인혜 경성대 교수·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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