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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김연갑 “애국가는 윤치호 작사, 명제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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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의 기록, 계관시인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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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충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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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 제10장 무궁화가, 윤치호 역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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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가 제14장 애국가, 윤치호 역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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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서지학자


【서울=뉴시스】 신동립 기자 = ‘애국가 작사자=윤치호’라는 최종결론이 제시된다. 애국가를 누가 작사했는지 미확정인 상태로 소모적 논쟁만 거듭되고 있는 현실을 정리하는 논증이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23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여는 ‘애국가 작사자 규명’ 학술심포지엄에서 서지학자인 김연갑 위원장(국가상징연구회 애국가 분과)이 애국가는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밝힌다.

“기존의 애국가 연구는 민족주의 대 문명주의, 애국 대 친일이라는 대립 프레임으로 핵심을 회피하는 비이성적 구도”라고 짚으며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관련 “합리적 의문 5가지”에 답한다.

1955년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의 ‘작사자 미상’ 문제, 애국가와 후렴이 같은 ‘무궁화가’가 윤치호 작사라는 점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문제, 1981년 공개된 1904~1905년 필사 애국가 3종이 1907년 윤치호 작사를 반박한다는 문제, ‘찬미가’를 ‘역술(譯述)’했다는 표현은 ‘윤치호가 번역했다는 뜻’이라는 문제, 1945년 윤치호 자필 애국가 가사지 중 ‘1907년 작’ 표기와 현대식 국어사용 문제를 해소한다.

‘애국가 작사 미스터리의 논쟁에 대한 고찰’, ‘1945년 중경임시정부 발행 한국애국가의 현대적 의의’, ‘애국창가운동과 도산 안창호’, 그리고 ‘애국가 작사자의 비밀’ 등 최신 논문, 학술회의 발제, 저작을 종합검토한 분석이다.

김연갑은 “윤치호의 (훼절 전) 전반기 생애에서 애국가 작사의 배경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치호는 일본에 유학(1881~1883)하면서 서구문명을 접했고, 중국 유학(1885~1888)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했다. 미국 유학(1888~1893) 후 조선을 개혁하겠다며 청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조선 개국의 역사성을 부각하려고 ‘무궁화가’를 작사했다. 관직을 떠나서는 기독교적 구국 교육활동을 벌이며 애국 의지를 담아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이다. 1897년 ‘무궁화가’, 1907 ‘애국가’의 탄생이다.

두 노래의 상호 텍스트성을 통해서도 긴밀성을 확인한 김연갑은 “많은 애국가류가 발표되고 새로운 애국창가가 보급되던 당시 상황에서 두 노래가 선택을 받아 오늘날까지 전승된 데는 윤치호의 시대정신에 호응한 민중이 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개국을 기리고자 ‘무궁화가’, 책임의식과 독립의지를 담은 교육운동 실천을 위해 ‘애국가’를 작사한 것”이라고 못 박았다.

안창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주장은 그럼에도 여전하다. 김연갑은 “기독교계, 특히 감리교는 잘 알면서도 ‘애국가 작사자는 윤치호’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근대사 연구자들도 마찬가지다.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사실을 포스트 트루스(탈진실)가 덮고 있는 셈이다.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을 향한 호소나 개인적 신념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듯 언론도 윤치호만을 다루지 않는다. 안창호와 함께 논쟁 중이라고만 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애국가 작사자다’는 명제고, 이는 1945년 자필 가사지에 남긴 ‘1907년 윤치호 작’이라는 진술을 참(眞)이게 한다. 존재하는 것이 모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것만이 모두 존재한다.”

윤치호는 변절했고, 안창호는 독립운동을 했다. 친일파가 우리나라의 국가를 지었다는 팩트를 외면하고 싶은 감성 덕분에 안창호 작사설이 숨쉬는 상황이다. ‘윤치호 작사’에 딴죽을 걸어야 관심을 모을 수 있는 것이 ‘안창호 작사설’이기도 하다.

reap@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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