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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미래의 눈]인공지능과 함께 인터넷 방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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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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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는 습관처럼 ‘실버라이닝 TV’의 화면을 켰다. 실버라이닝은 수백개에 달하는 전 세계 인터넷 방송사들 가운데 하나였고, 매월 집계되는 방송사 순위에서 단 한 번도 200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규모가 작았다.

실버라이닝의 첫 화면에는 방송사 내에서 시청자가 가장 많은 채널들이 순서대로 늘어서 있었다. 1위는 천천히 녹고 있는 빙산의 실시간 중계, 2위는 수천 마리 굼벵이들이 탈피를 위해 나무로 기어오르고 있는 어느 숲의 실시간 광경이었다. 상위 방송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성 넘치고 독특한 온갖 사람들의 매력을 광고하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실버라이닝은 이른바 ‘느긋한 방송’을 주로 다루는 방송사 중 하나였다.

정유는 즐겨찾기에서 ‘나비아기’ 채널을 골라 화면을 띄웠다. 방 한복판에는 아기용 울타리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반투명한 나비가 잔뜩 매달린 모빌이 돌고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나약해 보이면서도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정유는 아이가 실제로 어디에 사는지, 이름이 뭔지 알지 못했다. 아이가 친어머니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은 순수한 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방송용 카메라는 늘 아기 울타리에 고정되어 있었고, 아이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여성은 그리 자주 화면에 등장하지 않았다. ‘나비아기’ 채널의 시청자 수는 20명을 정점으로 해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는 정유를 제외하면 꾸준히 시청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정유는 아이와 어머니의 신원을 알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일 거라 생각했다. 인기 있는 개인 방송자들은 익명에서 시작해 결국 신원을 밝히고 스스로 연예인이 되기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였다.

방송 초반의 호기심이 완전히 사라진 지금, 나비아기 채널에 접속한 시청자는 정유와 또 한 사람이 전부였다. 그 사람의 아이디는 ‘신비’였다. 단 두 사람만 보고 있는 방송 채널의 채팅창은 잠들어 있는 아기처럼 고요했다.

그게 바로 정유가 나비아기 채널을 항상 띄워놓는 이유였다. 공허하지 않은 고요함. 가끔 심하게 울고 보채거나 눈을 감은 채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웃는 아기의 모습. 정유에겐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켜보고, 그 아름다움의 일부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걸로 족했다.

‘띠링.’

채팅창에 대화가 한 줄 올라오고 신호음이 울렸다. 정유는 채팅을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창을 닫으려고 손을 움직이다가 동작을 멈췄다.

신비> 아이가 이상하지 않아요?

정유는 그 말에 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얼핏 보기에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신비는 여전히 아이가 비정상이라고 강조했다. 정유는 방송화면을 확대해 본 다음에야 신비의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아이의 오른쪽 얼굴과 오른손이 반복적으로 경련하고 있었다. 정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신비가 말했다.

‘아이에게 신체적인 이상이 있다고 봐도 될까요?’

정유는 분노가 솟았다. 이상이 있든 없든 그건 시청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 어떡해서든 아이 엄마를 방으로 불러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까. 경찰에 신고하면 제때 출동은 해줄까. 아이와 어머니의 위치를 파악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정유와 달리 신비가 침착하게 말했다.

‘저는 모든 인터넷 방송에 상주하면서 인간을 배우고 있는 인공지능 신비입니다.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방송자의 신원을 추적할 수 있지만 인간의 신고가 필요합니다. 신고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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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는 그 후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조기에 병원으로 옮겨졌고,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비아기 채널이 다시 열리고 곤히 자는 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채널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채널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진아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유는 진아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고 행복감을 느꼈다. 나비아기 채팅창에 접속해 있는 시청자는 여전히 정유와 신비 둘뿐이었다. 시청자를 늘리기 위해 온갖 기행을 일삼는 방송자들이 적지 않은 인터넷 방송의 세계에서, 아기를 바라보기만 하는 인간과 인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인공지능만이 ‘나비아기’ 채널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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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말을 접하면 우리는 명백히 선을 그을 수 있는 차이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변화의 한복판에 있는 동안에는 그 선을 깨닫지 못한다.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다음 생각할 여력이 생겼을 때 비로소 세상이 변했다고 단정을 짓는다. 하지만 그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우리 자신마저 쉬지 않고 변한다면, 변화야말로 삶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이나 경제 공황 후에는 회복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기술 발달로 인한 변화는 우리의 ‘외부’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쉴 새 없이, 야금야금 적시기 때문에 별도의 회복기가 없다. 그리고 바야흐로 우리는 ‘새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그 새 존재, 다른 말로 인공지능은 함부로 내칠 수 없는 식구가 될 예정이다. 새 식구가 가정에 들어오면 가족들 모두가 그를 포용하기 위해 한층 더 성숙하고 늘 적응해야 한다. 인공지능의 출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키면서도 변화의 상징인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야 할 모양이다. 그러자면 우선 변해가는 우리 자신부터 제대로 바라보아야 함은 당연한 순서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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