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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5 (토)

[기타로 낙서하다]음악을 대하는 불편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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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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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우리의 오감으로 받아들이고 내뿜는 모든 것이다. 문화는 상징이자 세계관이다. 문화는 보는 것이자 듣는 것이고, 말하는 것이자 맛보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다. 또한 문화적 체험은 반드시 체현되어 이 사회의 요소로서 체화된다.

문화적 욕망을 정제한 에센스를 우린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작품은 문화를 아우르는 표상이다. 그것은 시대의 상징이자 역사적 기록이지만 상품이기도 하다. 사회가 소위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한다.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에서 예술과 문화라는 낱말에 산업이라는 글자가 붙는 순간 창작 권리자는 사라진다. 예술작품의 창조자가 문화예술산업에서는 철저히 소외된다. 대신 자본과 대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음악은 그 정도가 심하다. 영화에 나오던 주연 배우가 갑자기 사라지고 영화가 끝난다면 어색하고 이상하지 않겠는가.

나는 대중음악가이다. 기타를 연주하고 작곡과 작사도 더러 한다. 내가 처음 프로 뮤지션이 되었을 때는 방송사가 절대 갑이었다. 1980년대 이야기지만 당시 음악방송 PD는 권력자였다. 좀 잘나가는 음악방송 PD는 신적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잘보이면 스타가 되었고 잘못 보이면 접어야 했다. 가수는 임금의 간택을 기다리는 반가의 규수 같았고, 매니저는 권문세가에 뒷줄이라도 놓아보려는 장사치 같았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시장에 어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어쩌겠나.

히트곡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방송이나 길거리에서 같은 노래가 계속 들린다면 인기가 많아 그렇거니 생각하겠지만 실은 많이 나와서 히트곡이 되는 것이다. 친근한 것이라 많이 나오는 게 아니고 많이 나와서 친근한 것이다. 인지도 싸움이다. 음악이나 정치나 인지도가 전부다.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인지도 쌓기’는 많은 가수들을 예능으로 인도한다.

“음악이 좋은 한 가지 이유는 아픔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레게음악의 신’ 밥 말리의 말이다. 음악이 좋은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하지만 음악은 생필품이 아니다. 음악은 기호상품이다. 10년 동안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는다. 그저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를 포기했을 뿐이다. 굳이 음악을 사지 않아도, 기호에 의한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음악은 흔하다.

어느 강연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음악을 구매해 보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5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답하길 “한 15년 되었을까”라고 했다. 이분도 20대 시절엔, 지금은 잊혀진 ‘판가게’에서 음반이며 테이프며 많이 사셨다 한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요즘은 왜 구매하지 않나요” 하자, 돌아온 답은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였다. 살기 바빠서나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법을 몰라서였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하긴 함들지만 요즘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 비해서는 ‘몰라서’가 합리적인 이유로 들린다.

음악산업은 왜 모든 세대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지 않는가. 그저 디지털 판가게를 만드는 것뿐 아닌가. 그런데 스마트 디바이스와 관련 애플리케이션과 결제 시스템 등등 우리의 플랫폼은 소비자에게도 친절하지 않다.

디지털 음악시장이 주류가 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선악의 유무를 떠나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정량적으로 들여다볼 계기가 되어서다. 듣는 이에게 음악은 아픔을 잊게 만드는 것 이지만, 동시에 만드는 이에겐 고통을 안기는 이유가 되었다. 불공정 때문이다.

“너희는 도대체 어떻게 먹고사냐?” 영화하던 친구가 내게 한 말이다. 1990년대 말, 음반 불법 다운로드와 불법적 공유가 성행하던 시대였으니 걱정해줄 만했다. 나는 친구에게 “너희도 얼마 안 남았어”라고 말했다. 친구는 “그럴 리가 없다. 아직은 멀었다. 영화는 음악보다 용량이 크잖아”라고 말했지만 친구의 바람이 깨지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와 나는 걱정의 결이 다르다.

음반, 음원산업은 더 이상 독립적이지 않다. 독립적으로 성장하지도 못한다. 음반, 음원산업은 이미 스마트 디바이스 산업에 종속되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초고속 인터넷이 내 집에서 가능해졌을 때도 그 이후에 벌어질 문화산업에 대한 권리침해를 짐작하지 못했다. 하물며 스마트폰에 있어서랴.

경향신문

기술 발전과 확산은 비선형적이다.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변화의 분기점은 다양하다. 게다가 우리의 예측보다 항상 앞선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전 세계인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천지개벽,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다.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전 세계 대통령들과의 네트워킹도 가능하다. 이런 변화야말로 비가역적이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여명기에 와있다. 지금부터 경험할 변화는 예측하기 더 어렵다. 스마트폰 하나가 세상을 바꿨지만 음악산업은 종속되었다. 물론 불행한 예이다. 사물인터넷, 좋은 변화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했던 수많은 불공정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한류는 사실 드라마와 대중음악이 전부다. 하지만 정부 부처 중 음악을 담당하는 부서조차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에 하나 둘 만도 한데. 음악을 대하는 태도는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

<신대철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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