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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금)

남성주의 현대 휘젓는 중세 여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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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조연에 감독도 여성…‘원더 우먼’ 31일 개봉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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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 테스트’란 것이 있다. 영화가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지 보여주기 위한 성평등 테스트다. 이 테스트에 통과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이름을 가진 여성이 2명 이상 나올 것, 이들이 서로 대화할 것, 대화 내용에 남성 관련이 아닌 다른 내용이 있을 것. 살펴보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즘 할리우드의 주된 콘텐츠인 슈퍼히어로 영화는 말할 것도 없다. 초능력이든 아니든, 완력을 주로 사용하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중심엔 대체로 남성이 있었다. 31일 개봉하는 <원더 우먼>은 다르다. 여성 주연, 여성 조연에 감독도 여성이다.

속세로부터 떨어진 섬 데미스키라는 여성들만 사는 왕국이다. 강력한 전사로서의 운명을 타고난 다이애나 공주(갤 가돗)는 어머니인 히폴리타 여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성장한다. 1차대전 중 적에게 쫓기던 미군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가 데미스키라 인근에 불시착하자, 다이애나는 그를 구조한다. 트레버로부터 세상의 참상을 전해들은 다이애나는 전쟁의 근원인 아레스를 제거하고 선을 회복하기 위해 세상에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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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스키라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장소다. 제우스가 이곳 사람들에게 인간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신성한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설정됐다. 데미스키라는 인간의 역사로 치면 중세 정도의 문명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왕과 전사가 있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쏜다. 데미스키라 사람들은 20세기 현대 문명에 대해서도 무지하지 않지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독자적인 생태계를 꾸린다. 이런 세상에서 나고 자란 다이애나가 남성 중심의 현대 사회와 마찰하는 지점에서 웃음이 유발된다.

당시 서구는 여성 참정권 운동이 갓 벌어질 정도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거리의 남성들은 다이애나를 보며 휘파람을 부는 등 상시적으로 희롱하고,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회의장에는 온통 근엄한 표정의 남성 정치인들뿐이다. 트레버의 여성 ‘비서’가 하는 일이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한다”는 답을 듣자, 다이애나는 “그건 우리 세상에선 노예라고 부른다”고 답한다. “뱃살을 감춘다”는 코르셋의 용도를 듣고는 “뱃살을 왜 감추냐”고,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보고는 “저런 걸 입고 어떻게 싸우냐”고 답한다. 물론 미스 이스라엘 출신의 배우 갤 가돗에게 감출 뱃살 같은 것은 없다.

다이애나는 인간 내면의 선의를 믿는다. 그는 약자를 돕고, 악당을 물리쳐야 한다는 권선징악의 화신이기도 하다. 원더 우먼은 전략적 우회나 정치적 협상 따위를 믿지 않는다. 적의 강력한 기관총 때문에 교착된 전장에서, 약자를 구하겠다는 직관으로 혈혈단신 전선을 뚫는 원더 우먼의 활약은 카타르시르를 안겨준다. 트레버를 비롯한 주정뱅이, 사기꾼 등의 오합지졸 남성들은 이 강력한 여성의 활약에 고무돼 용기를 얻는다.

<원더 우먼>의 세계관은 같은 DC코믹스 소속의 슈퍼맨과 유사하다. 슈퍼맨은 외계인이지만, 능력으로만 보면 신에 가깝다. 인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려다가, 불의와 약자의 고통을 못 참고 행동에 나선다.

배트맨처럼 도덕적으로 회의하거나, 아이언맨처럼 세상의 풍류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서 <원더 우먼>의 후반부는 최근의 슈퍼맨 리메이크 작품들과 유사한 분위기다. 인간의 능력이나 고민을 뛰어넘은 신과 신이 맞붙는다. 어쩔 수 없이 인간사에 붙들린 관객은 우주적 대의를 중심에 둔 신들의 전쟁을 멀찌감치 지켜볼 따름이다.

<슈퍼맨 리턴즈> <맨 오브 스틸> 같은 최근의 슈퍼맨 연작들은 기대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원더 우먼>의 거대하고 순수한 고민에 현대의 관객이 화답할까. <몬스터>의 패티 젠킨스 감독이 연출했다.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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