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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그 노래가 TV에 나오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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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중음악사(史)에서 '금지곡'이 처음 탄생한 건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조선총독부가 대중가요는 물론 문화 전체를 억압·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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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1970년대 정부 주도로 제작된 음반들.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당시 금지곡이 담겼던 이미자·김추자·신중현·한대수의 앨범들. /조선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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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만큼 가혹했던 대중가요의 수난기는 또 있었다. 군사정권 시대인 1966년 탄생한 '예술문화윤리위원회'와, 1975년 '긴급조치 9호'로 인해 수백곡의 가요가 '금지곡' 반열에 올랐다. 이중에는 황당한 사유들도 적지 않았다. 물고문을 연상케 한다(한대수 '물 좀 주소'), 불신 조장(김추자 '거짓말이야'), 반말(송창식 '왜 불러'), 가사 저속(신중현 '미인'), 왜색이 느껴지는 창법(이미자 '동백아가씨') 등이 그 예다.

이후 예술문화윤리위원회는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로 명칭을 바꾸며 음반에 대한 사전심의를 계속했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이 곡이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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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가 작사·작곡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시대유감(時代遺憾)' 일부분이다. 이 노래는 본래 1995년 10월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륜은 노래의 가사가 현실 부정적이고 과격하다는 이유로 가사의 수정을 요구했다. 당시 24살이던 서태지는 공륜의 조치에 반발하는 의미로 가사를 모두 삭제한 채, 연주곡 형태로 '시대유감'을 발표한다. 그러면서 "나이든 유식한 어른들('시대유감' 속에 등장하는 표현)에 의해 불가 판정을 받아 유감"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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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유감'이 담긴 서태지 4집 앨범.


국회에 편지 보낸 소녀팬
서태지의 팬들도 PC 통신 상에 글을 올리고 서명운동을 하며 공륜에 반발했다. 그중 한 여고생은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총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서 사전심의제 폐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마침내 이듬해 1996년, 사전심의제는 위헌 결정을 받았고 공륜과 함께 사라진다. 같은 해,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를 기념해 본래의 가사를 살린 '시대유감'을 발표했다.

사전심의제에 반발을 표시한 이들은 서태지와 그의 팬들 뿐만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가수 정태춘은 공륜의 심의에 걸린 곡들을 당당하게 음반에 담아 발표하며, 사전심의제 폐지 운동을 이끌었다. 이렇게 탄생한 음반이 1993년 '92년 장마, 종로에서'다. 그는 직접 헌법재판소에 심의를 청구해 '사전심의제 위헌' 결정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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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여가부 홈페이지에 고시된 청소년유해매체물. 성인인증 후 볼 수 있다. (오른쪽) 음원 사이트 '멜론' 리스트에 청소년 접근 제한 표시인 '19'가 붙어있다. /각 사이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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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륜과 사전심의제가 사라진 후, 대중가요에 대한 심의는 대중가요의 주 소비층인 청소년에게 맞춰진다. 1997년부터 유해매체물 규제, 유해약물 및 유해업소 규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청소년보호법'이 시행됐다. 청소년보호법이 여성가족부 소관이다 보니 대중가요에 대한 청소년 유해판정도 자연스레 여가부에서 하게 됐다. 여가부는 청소년보호법의 내용에 따라 청소년유해매체물을 지정하고 있다.

청소년유해매체물이란?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심의·판정하는 매체로, 대상은 대중가요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영화·공연·영상·방송·신문·잡지·광고·게임 등 광범위하다. 음반의 경우 '청소년 유해' 판정을 받으면 19세 미만 청소년에게 판매가 금지된다. 이 노래들은 음원 사이트에서도 '19금' 딱지가 붙은 채 공개되며, 성인 인증을 거쳐야 듣거나 가사를 볼 수 있다. 또한 방송에서도 오후 10시 이전에 해당 노래를 내보낼 수 없다. 이를 어길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여성가족부는 매월 홈페이지에 청소년유해매체물을 고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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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 받은 여가부의 청소년유해매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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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가요계에서는 1970년대 군사정권 시대에 비견하는 수난이 벌어졌다. 가요 심의의 칼을 쥔 여성가족부가 청소년들이 즐겨 듣는 가요 수십 곡에 무더기로 '19禁 딱지'를 붙인 것이다. 특히 몇몇 곡들은 노래 전체의 맥락은 무시한 채, 단지 '술·담배' 등의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됐다. 발매된 지 꽤 시간이 흐른 바이브의 '술이야'(장혜진이 편곡), 전람회 '취중진담'(김조한이 편곡) 등도 이에 포함됐다.

싸이는 여가부의 조치에 대해 "황당하다, 이러니 인생은 독한 술(노래 가사 인용)이다"고 비꼬았고, SM·큐브 엔터테인먼트 등 대형 기획사들은 "헌법상 표현의 자유 침해"라며 여가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여가부 홈페이지는 성난 네티즌들의 항의 글로 한때 다운이 되기도 했다.

사태는 여가부의 음반심의위원장이 사퇴하고 심의 기준을 완화하겠다는 발표가 나온 후에야 일단락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2년, '술이야', '라잇나우', '아메리카노' 등 대중을 납득시키지 못한 몇몇 금지곡이 유해매체물에서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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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가족부의 '청소년유해매체물'과 별개로, 각 방송사에서는 자율적으로 가요 심의를 하고 있다. 공륜에 의해 일괄적으로 행해지던 심의가 자율로 넘어간 것이다. 때문에 방송사별로, 또한 지상파냐 케이블 방송이냐에 따라 기준이 판이하게 다르다.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해당 가사나 안무를 수정해 재심의를 받아야 하고, 심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해당 방송사의 모든 프로그램(라디오 포함)에서 노래가 나오지 못한다. 다만, 여가부의 '청소년유해매체물'과 달리 법적인 제재는 없다.

대표적으로 KBS의 가요 심의 사례를 통해, 어떤 곡들이 어떤 이유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고 있는지 살펴보자.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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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송에서 '바다의 왕자'를 부르는 박명수. /방송 캡처


욕설·비속어·저속한 표현
KBS 가요 심의에서 가장 많이 '걸리는' 건 비속어와 저속한 표현이다. 싸이의 신곡에는 '찐따', '찌질이', '개쩌리'와 같은 가사가 포함돼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타이틀곡 'I LUV IT' 속 '수박을 먹을 땐 씨 발라먹어'라는 대목 역시 욕설로 들린다는 이유를 들었다. 과거에는 윤종신 '팥빙수'('열라 좋아'라는 가사 때문), 박명수 '바다의 왕자'('세 겹 뱃살 접힌 아줌마'라는 가사가 저속함) 등도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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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샤벳 '조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이 곡은 KBS에서 음원과 뮤직비디오 모두 방송 불가됐다. /캡처


선정적·외설적 표현
성행위를 묘사·연상시키는 선정적인 표현도 방송 부적격을 받는 주요 이유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요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기준이 모호하다. 과거 달샤벳의 '조커'(신체 특정 부위를 연상시킴), 포미닛의 '안줄래'('다시 너한테는 안 줄래'라는 가사가 선정적), 요조의 '불륜'(노래의 전반적인 맥락이 불건전) 등이 방송 부적격 철퇴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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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는 본래의 곡명 '로또(lotto)'를 '라우더'로 바꾸고 방송 활동을 했다. /방송 캡처


특정 브랜드 언급 (간접광고)
위의 두 경우가 아니라면 '간접광고'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KBS의 경우 특정 브랜드의 이름만 나와도 방송 부적격 판정을 내린다. 대표적으로 악동뮤지션의 'Galaxy'는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갤럭시'와 이름이 같다고 해 방송 부적격이 되었다. 엑소의 '로또' 역시 같은 이유로 KBS와 MBC에서 지적받았는데, 이 때문에 엑소는 '로또'를 '라우더'로 바꾸어 활동했다. 제시카는 'Fly' 속 자동차 브랜드(크라운 빅토리아, 벤츠)를 무음으로 처리한 후에야 방송에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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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어리' 단어 때문에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미미 시스터즈. /앨범 사진


타인 비하 표현
장애인이나 특정 직업을 비하하는 표현도 방송 부적격에 해당한다. KBS는 미미시스터즈의 '미미'를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네'라는 가사 때문에 방송 부적격 판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똑같이 '벙어리' 단어가 들어가는 장기하의 노래에 대해서는 심의를 통과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씨스타의 '니까짓게'는 타인을 비하한다는 이유로, 싸이의 'I LUV IT'은 연예인을 비하하는 '딴따라'를 사용해 지적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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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송에서 "일본어 노래를 못 튼다"는 자막이 나오고 있다. /방송 캡처


일본어 사용
공중파 3사는 일본어가 들어간 노래 가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일본 노래는 라디오에서도 틀지 않는 것이 관례다. 가사가 없거나 영어로 된 일본 음악은 괜찮지만, 일본어 가사가 들어가면 안 된다. 걸그룹 크레용팝의 '어이(Uh-ee)에는 '삐까뻔쩍'이라는 일본어가 포함돼 방송 부적격을 받았다. '츤데레'와 '사쿠라'를 쓴 선우정아와 구자형 역시 방송에 노래를 내보낼 수 없었다.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의 경우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와 각 방송사로부터 심의를 받는다. 영등위는 뮤직비디오를 사전 심의하여 5단계(전체관람가, 12세 이상·15세 이상 관람가, 청소년 관람 불가, 제한상영가)로 등급을 부여한다. 단, 방송사의 심의를 통과한 뮤직비디오는 영등위의 심의를 받지 않아도 된다. 뮤직비디오는 음원과 달리 가사보다는 영상이 심의 대상이 되는데, 영상에는 뮤직비디오의 내용, 안무, 의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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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싸이 '젠틀맨'의 뮤직비디오는 이 장면 때문에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오른쪽) 현아는 뮤직비디오를 '19禁'과 '일반' 두 가지 버전을 제작해 방송사 심의를 통과했다. /뮤직비디오 캡처·티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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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비디오 심의에서도 논란을 일으킨 작품들이 적지 않다. 싸이의 '젠틀맨'이 대표적이다. 이 뮤직비디오는 유튜브에서는 조회 수 1억 건을 돌파했지만, KBS에서 단 한 장면 때문에 방송 불가 판정을 받았다. 싸이가 주차 금지 시설물을 발로 차는 것이 '공공시설물 훼손'이란 이유에서였다. 장윤정의 '초혼' 뮤직비디오는 굿을 하고 작두를 타는 장면이 삽입돼, 지상파 3사에서 모두 외면당했다. 오렌지캬라멜의 대표곡 '까탈레나' 뮤직비디오는 '인명 경시'라는 전례 없던 이유로 방송 불가를 당했다. 이 뮤직비디오 속에는 멤버들이 '초밥'이 되어 비닐 팩 속에 들어가 있고, 그 위로 가격이 표시되는 장면이 나온다.

뮤직비디오가 '방송 불가'를 받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가수들은 아예 방송용과 비(非) 방송용을 따로 제작하기도 한다. 현아는 본인의 솔로앨범 '빨개요'를 발표하며 좀 더 자극적인 장면을 담은 '19禁' 뮤직비디오를 별도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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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이 막 등장하기 시작한 90년대 초·중반에는 방송사가 가수들의 염색 머리까지 금지할 만큼 규제가 심했다. 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가수들은 모자나 두건으로 염색 머리를 가리려 애를 썼다. 그러나 이제는 가수들의 대응법이 달라졌다.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 '쿨하게' 음악 방송 출연을 포기하는 가수가 적지 않다. 음악을 알리는 통로가 방송 외에도 무수히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실상, 방송에 나오지 않아도 본인이 듣고 싶다면 어떻게든 들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다.

그럼에도 여성가족부나 각 방송사가 가요 심의를 하고 있는 건 '최소한의 장벽'을 위해서다. 유해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하는 것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영방송에서 '모두가 보기에 적절치 않은 것'을 가려내는 건 우리 사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심의 기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느냐다. '독'과 '장벽' 사이에서 안정적인 균형을 유지하는 건, 음악을 만드는 예술인들은 물론 이를 즐기고 평가하는 소비자들이 함께 해결해야 할 숙제다.

[구성 및 편집=뉴스큐레이션팀 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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