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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이굴기의 꽃산 꽃글]매화말발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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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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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가 우렁차서 그 이름을 얻었다는 수성동(水聲洞) 계곡을 지나 인왕산을 오른다. 아파트를 허물고 옛 모습을 복원했다지만 조야한 현대식 공원이 내는 소리는 귓전에 닿기도 전에 사그라든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는 동네에서 신비는 사라진다. 모든 걸 과학의 잣대로 재단하고 여지를 없애버린다. 청계천 발원지라는 작은 웅덩이를 호령하던 가재나 새우는 어디로 갔을까. 지리산에 반달곰을 방사하듯 인왕산에 호랑이를 풀어놓으면 어떨까. 그런 쓰잘머리 없는 생각을 발등으로 내려보내기도 하면서 인왕산 중턱 석굴암에서 맨손체조를 했다.

팥배나무 그늘에서 나무의 근황을 살피다가 하산하는 길이었다. 깔딱고개를 내려오니 약수터 의자에서 할머니로 기우는 듯한 나이의 아주머니가 혼잣말을 했다. “아이고, 웬만하면 가겠는데, 이젠 더는 못 올라가겠네.” 내가 자리를 뜨려는 눈치를 보이자 물끄러미 옆 계곡으로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작년보다 더 덥고 어제보다 더 덥네. 내일은 또 어째.” 투정하듯 계곡으로 말을 던지는 것이었다. 조금 전 산에 오를 때 나는 저 계곡에서 손과 얼굴을 씻었다. 나를 세탁하고 난 계곡은 또 혼자 저 아래에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계곡은 텅 비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은은한 공간 속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생명의 기운을 잉태시킬 수 있”(<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는 상태가 된 것이리라.

새삼 계곡을 다시 바라보았다. 호젓한 공간에 땀과 괴로움으로 범벅이 된 두 사람과 달리 계곡에는 꽃이 풍성하게 피어 있다. 굳이 바위틈에 뿌리내리기를 좋아하는 견고한 나무, 매화말발도리이다. 흘러가는 물은 물론 지나가는 비도 바위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불리한 조건을 이용하기에 그만큼의 기품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무는 작년의 가지 끝에 올해의 가지를 두세 마디 달아놓았다. 꽃은 오로지 묵은 가지의 겨드랑이에서만 피어난다. 이 또한 신비라면 신비가 아닐까. 계곡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바위와 함께 이 세상의 한 아래를 묵묵히 담당하고 있는 매화말발도리, 수국과의 낙엽관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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