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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디테일추적>알파고가 시전한 '참교육'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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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AlphaGo)는 완벽하지 않다. 아직 파고들 틈이 많아 보인다. 난 내가 6할 정도 승산이 있다 생각한다. (从整个过程看,‘阿尔法狗’还不是完美的,仍有许多值得商榷的地方。我坚信我仍有六成胜算。)”

바둑 랭킹 세계 1위 커제(柯潔·19)가 지난해 3월 자신의 SNS에 남긴 말이다. 그로부터 1년 2개월여가 흐른 지난 27일, 커제 9단은 알파고에게 3연패 한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 세계인 앞에 허리 숙여 인사하며 “칭찬받을 자격이 없다. 져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한 해 전보다 겸허하고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이처럼 여물지 못한 풋사과 같던 이가 매콤한 맛을 보고 크게 각성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인터넷 커뮤니티발 용어가 있으니, 바로 ‘참교육’이다. 오늘은 인간을 참교육시키고 은퇴한 알파고 선생을 기리는 의미에서 참교육의 유래와 용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참교육의 함성으로
참교육의 유래는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1년 9월 18일, 마산종합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VS 롯데 경기 도중 1루 주자였던 롯데 타자 펠릭스 호세가 마운드로 뛰쳐나와 삼성 투수 배영수의 턱을 후려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호세는 배영수가 몸쪽으로 바짝 붙여 던지는 빈볼을 피하다 포볼로 출루해 있었는데, 다음 타자 훌리안 얀마저 몸쪽으로 오는 공에 허리를 얻어맞자 격분해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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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영수! 돈 두 댓/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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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건 이후 뜬금없이 배영수의 야구 재능이 꽃을 피웠다. 2002년 6월 23일부터 2005년 8월 31일까지 롯데를 상대로 14연승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high)를 찍은 것이다. 이 때문에 디시인사이드 야구 갤러리(야갤)에서는 호세가 쏘아올린 크고 아름다운 불주먹 덕택에 배영수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이후 신승현 선수 사건을 거치며 이 가설은 한층 더 힘을 얻었다. 2006년 8월 5일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SK VS 롯데 경기에서 SK 투수 신승현이 호세 몸에 맞는 공을 던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신승현은 방망이를 꺼내 드는 자세를 취해 가며 호세의 참교육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 덕에 신승현의 볼살과 턱뼈는 고초를 면할 수 있었지만, 정작 육신의 주인은 몰락을 피하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신승현이 기묘하게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며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에 감명받은 야갤러들은 호세의 주먹질을 참교육이라 일컬었고, 호세를 이 시대의 참스승으로 받들었다. 물론 폭력을 바른 교육으로 칭하는 게 부당하다는 여론도 상당했기 때문에 초반엔 이 용어가 널리 퍼지지 못했다. 하지만 정작 사건 당사자인 배영수마저 “그 사건 이후 제가 야구를 잘하게 됐습니다”고 인정하며 분위기가 반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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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수 선수가 지난 10일 언론 인터뷰에서 호세의 '참교육'을 인정하는 모습./인터넷 캡쳐


이후 이용찬 음주뺑소니 사건, 최우석 임의탈퇴 사건 등 선수들이 못난 짓을 벌일 때면 되려 팬들이 호세에게 참교육을 청하기에 이르렀고, 이런저런 일로 거듭 쓰인 끝에 참교육은 야구 팬덤 내에서 ‘가르침에 따른 갱생(更生)’을 뜻하는 말로 완전히 굳어지게 된다.

물론 참교육을 논하며 체벌을 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교사들이 드물게 있던 21세기 초반 분위기도 이 용어의 유행에 일조했다 한다. 이 때문에 한때 펠릭스 호세 응원가를 전교조 상징곡인 ‘참교육의 함성으로’로 하자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여담으로 2007년 북미로 떠났던 호세는 6년 만인 2013년 6월 잠시 한국을 방문하며 배영수와 신승현의 안부를 물었고, 야갤러들은 몸은 멀리 있을지언정 마음은 늘 제자 곁에 둔 참스승이라며 경탄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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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6월 입국한 당시 펠릭스 호세./조선일보DB


#어디까지가 참교육인가
용어가 유래한 사건이 워낙 강렬해서 간과되기 쉽지만, 사실 현실에서 ‘참교육’이 쓰이는 상황은 물리적 폭력 행사와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주먹질 말고도 사람을 혼낼 방법은 많고, 실제로 현실엔 경찰 신고나 소송 등 폭력 이상으로 날카로운 갱생 도구가 허다하다.

예를 들어 2013년 여름 축구선수 기성용이 자신의 SNS에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 “우리를 건들지 말았어야 했다” 등 최강희 국가대표팀 감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여론의 폭격을 맞고 반성해 멘탈을 다잡고 국가대표팀의 심장으로 거듭난 일도 참교육의 사례로 들 수 있다. 같은 해 5월 일베저장소(일베) 회원이 5·18 희생자 관을 ‘홍어 택배’로 비하했다가 고소당해 이듬해 7월 희생자 묘지에 찾아가 사죄한 것도 일종의 참교육 시전이다. 참교육 운운한다 해서 무작정 폭력을 옹호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폭력보다 훨씬 중요한 참교육 성립여건은 ‘성장’이다. 상쾌하게 혼을 내줬다 한들 교육 전보다 나아진 게 달리 없으면 참교육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얼마 전 웹툰 작가 레바가 NH 농협은행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대충 넘어가려 들자 언론 화력을 동원해 쓴맛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는데(웹툰 작가 '레바' 은행 직원 착오로 가압류, 실수직원에게 '전액배상'시킨 은행), 이 사건 이후로도 은행 태도나 서비스에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면 참교육이라 부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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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 농협은행 사건 당시 웹툰작가 레바가 그렸던 만화 중 한 장면./인터넷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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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아닌 곳에선
물론 현실보다 폭력이 쉽사리 등장하는 서브컬쳐계에선 어원에 가까운 참교육 사례를 여럿 찾을 수 있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두한(김영철 분)이 부하 상하이 조(조상기 분)를 시켜 심영(김영인 분)을 성불구자로 만들고 공산당 활동을 끊게 했던 것도, 해당 드라마 속 세계관에선 나름 참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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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할거야 안할거야!" "안하겠소! 닷씨는 안하겠소!"/인터넷 캡쳐


‘배트맨’ 역시 대표적인 참교육 스타일 히어로다. 1939년 첫 등장 이래 악당을 두들겨 패며 개과천선 시켜온 세월이 벌써 80여 년째다. 하지만 고담 시티엔 조커처럼 아무리 맞아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빌런이 워낙 많아 상당히 고생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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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다크나이트' 중 배트맨의 조커 취조씬./인터넷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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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따지고 보면 ‘참교육’도 일종의 고사성어라 할 수 있겠다. 고사성어 대부분은 옛 시절 벌어졌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조어다. ‘참교육’ 용어가 생겨난 과정과 거의 비슷한 것이다.

그러니 비록 참교육의 유래가 폭력 사건이었다 하더라도, 인터넷에서 이 용어를 쓰는 걸 너무 나쁘게 보진 않았으면 한다. 일석이조(一石二鳥)가 비록 돌을 던져 새를 때린 행동에서 유래한 말이지만, 이 고사성어를 쓸 때 돌팔매질을 연상하는 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참교육 또한 그러하다. 그 대상이 김정은이라도 되면 모를까, 웬만하면 정말 폭력을 써야 한다는 의미로 입에 담는 이는 드물테니.

[문현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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