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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논쟁적인 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네 가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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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행위자-연결망 이론’ 창시자

저작으로 과학기술학 대가 조명

이분법 넘어 ‘사물의 의회’ 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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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하이브리드 세계의 하이브리드 사상
아네르스 블록·토르벤 엘고르 옌센 지음, 황장진 옮김/사월의책·1만8000원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를 아우르는 새로운 학제적 연구 조류를 일컫는 ‘과학기술학’(STS)을 말할 때, 브뤼노 라투르(70)의 이름은 가장 앞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라투르 스스로는 과학기술학이라는 범주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근대’라는 관점을 허물고 인간과 비인간을 함께 사유하는 등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처음 읽는 브뤼노 라투르>는 라투르의 지적 작업들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해설해주는 라투르 입문서다. 덴마크 출신 과학기술학자 두 명이 함께 썼다.

지은이들은 라투르의 지적 여정을 두 가지 축을 따라 살피겠다고 밝힌다. 하나는 “사실은 제조된다”는 말로 대표할 수 있는 ‘주제적 축’이다. 라투르는 자연이 객관적·보편적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식의 기존 인식론을 비판하고, 과학적 사실이란 실험실에서 만들어져 여러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축은 ‘존재론-형이상학적 축’인데, 이것은 정신과 물질, 문화와 자연 등을 구분짓는 서구 근대의 이원론 자체에 대한 거부다.

이 두 가지 축으로 접근해보면, 라투르의 지적 작업은 그의 저작들이 그린 궤적에 따라 네 가지 얼굴로 드러난다. 첫번째 얼굴은 <실험실 생활>(1986), <프랑스의 파스퇴르화>(1988), <젊은 과학의 전선>(1987) 등의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과학인류학’이다. 애초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던 라투르는 70년대 서아프리카에서 실험실 생활을 하며 인류학을 공부했는데, 이곳에서 “사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자연은 객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이뤄지는 각종 ‘기입’ 행위를 통해 구성되는 어떤 질서라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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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류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브뤼노 라투르. 2013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르상’을 받은 바 있다. 사월의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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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르의 독창적 이론인 ‘행위자-연결망 이론’(ANT)도 이 과정에서 나왔다. 실험실에서 구성된 객체는 실험실 바깥에서 여러 행위자들의 투쟁을 거치며 전파된다. 예컨대 파스퇴르라는 위대한 인물이 미생물을 발견하고 백신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까지 포함하는 여러 행위자들의 ‘번역’ 행위를 통해 ‘프랑스의 파스퇴르화’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파스퇴르라는 개인이 아니라 ‘연결망’ 그 자체다.

주저로 꼽히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3)에서 라투르는 이런 과학적 연구의 기본 통찰로부터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작업을 펼친다. ‘근대성의 철학’이라는 두번째 얼굴이다. 1600년대 로버트 보일은 과학자들이 자연을 ‘대표’하도록, 토머스 홉스는 적절한 사회계약이 주권자들을 ‘대표’하도록 하는 절차와 구조를 발명했는데, 라투르는 이것이 “순수한 자연과 순수한 사회가 별개의 것으로 제시되고 ‘대표’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근대 헌법’의 시작이라고 봤다. 이런 ‘정화 행위’에 따라 자연과 사회를 초월적인 것으로 보는 근대성이 형성됐다. 그러나 근대성의 이름 아래에서 자연과 사회가 뒤섞이는 ‘하이브리드’는 되레 대규모로 확산됐다. 예컨대 냉동 배아, 전문가 시스템, 디지털 기기 등은 자연 또는 사회 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 실제로 세계가 ‘근대 헌법’의 계율대로 움직였던 적이 없다는 측면에서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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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류학, 사회학, 자연과학 등을 넘나드는 ‘하이브리드’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브뤼노 라투르. 2013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홀베르상’을 받은 바 있다. 사월의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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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라투르는 그런 ‘하이브리드’화 작업을 명시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정치적 집합체로서 우리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라투르의 정치철학을 보여주는 세번째 얼굴, ‘정치생태학’이다. <판도라의 희망>(1999), <자연의 정치학>(2004)이 대표 저작들이다. ‘근대 헌법’이 ‘자연의 방’과 ‘사회의 방’을 분리했다면, 이제는 자연과 사회를 오가는 하이브리드들이 하나의 동일한 민주적 과정으로 다뤄지는 ‘사물의 의회’를 만들자는 주장이다. 이는 인간과 분리된 객관적 실체로 자연을 바라보는 기존 환경운동과는 다르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인간의 영향으로부터 자연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자연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행위성과 역할, 권력 관계를 재분배하는 문제”다. 라투르는 우주의 모든 행위자를 정치적 주체로 포함시키는 ‘코스모폴리틱스’를 제안한다. 네번째 얼굴은 자신의 사회 이론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로서 ‘결합의 사회학’이다. <사회적인 것의 재조립>(2005)에서 라투르는 자신의 사회학을 ‘결합의 사회학’이라 내세우고, 주류 사회 이론인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과 대립각을 세운다.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 사회를 하나의 확립된 실재의 영역으로서 모든 사회적 현상에 대한 설명의 원천으로 간주한다면, ‘결합의 사회학’은 “사회 자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사회 자체가 설명되어야 한다”는 표어를 내건다. 사회학의 핵심을 행위자(개인)와 구조(사회)의 관계로부터 인간 행위소(사회)와 비인간 행위소(자연)의 관계로 전환하려는 시도다. 전자가 에밀 뒤르켐으로부터 나왔다면, 라투르는 가브리엘 타르드에게 줄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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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데다 서구 사상의 지배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라투르는 곧잘 논쟁과 비판의 대상에 오른다. 그러나 지은이들은 “세계가 어떻게 조립되는지 우리가 이미 그리고 단번에 알고 있다는 무의식적 가정에 대한 예방접종”이라며 라투르의 사유를 높이 평가한다. 모든 선험적인 보장과 확실성을 내려놓고 새로운 지평으로 떠나는 탐사의 출발점이란 평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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